주위에 둘러진 천막만 아니었더라면, 아니 천막 앞 송전탑에 걸린 '고압선 이전 결사반대' 현수막만 없었더라면 여느 동네의 사랑방 분위기다.
난로를 가운데 놓고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아낙네들이 있다. 면담을 피해 달아나는 부평구청장의 자동차 앞 길에 누워 "제발 우리 얘기를 들어달라"고 울부짖던 그 아낙네들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역시 어머니는 강하다.
한창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얼마 전 부평구 십정동 송전선로 이전 반대를 요구하며 공사현장에서 농성 중인 주민들을 찾아갔다. 부평도서관에서 뒷동산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5분 남짓 올라가니 70m는 족히 넘어보이는 송전탑이 거대한 몸집을 드러낸다.
재작년 여름, 서구 원창동에서 태풍 '갈매기'의 강풍에 쓰러졌던 송전탑 보도가 얼핏 기억난다. 한 겨울인 요즘 태풍 걱정은 없지만, 송전탑 바로 아래 천막을 치고 농성중인 주민들을 보면 불안한 마음이 절로 든다.
천막 안으로 들어가니, 추운 밖의 날씨와는 달리 훈훈하다. 가운데 놓인 난로와 2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의 체온이 추위를 막고 있다. 따끈한 커피를 한 잔 받고 스티로폼이 깔린 자리에 엉덩이를 걸쳤다.
"보통은 30명이 넘어. 지금은 남자들이 물 뜨러 가서 그래."
40대 아주머니부터 70이 넘어보이는 할머니까지 동네 여자들은 다 모였나 보다. 한 중년 아주머니가 기자의 "사람이 많다"는 말에 대꾸했다.
10월부터 이불, 반찬 등 주민들 가져와
앉아서 천천히 둘러보니,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구석에 곱게 개 놓은 이불, 천막에 걸린 달력과 빼곡히 쌓여 있는 컵라면 박스, 휴지, 종이컵과 물이 있다. 입구 주방으로 보이는 선반에는 집에서 싸 온 반찬들과 막걸리, 이쑤시개, 커피믹스가 있다. 한 아름 꽃도 놓여 있다.
간간히 동네 교회에서 라면이나 다른 물품을 도와주기도 하지만,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물건들은 주민들이 직접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지난해 10월 초부터 공사가 시작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하루 24시간 지켰다니 이 정도 살림이 갖춰질 법도 하다.
"그게(송전선로가) 전파도 안 좋고. 모든 것이 다 안 좋아"라며 고개를 절로 흔드는 한 할머니는 올해 78세다. 매일 이곳에 나와 동네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고 쉬면서 공사장을 지킨다.
"낮에는 주로 아주머니들이 나오고 남자들이나 젊은이들이 밤에 오죠.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밤에 나와야 하니까요." 김민씨의 말이다.
지중화 해결 전까진 일상 못 돌아가
십정동 송전탑 반대 지중화 실천 모임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김민씨는 "주민들은 시공업체가 공사를 언제 시작할지 모르는 불안감에 항상 올라와서 지키고 있다"며 "주민들은 주거환경과 재산권, 건강에 관련된 지중화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송전선로 이전 문제로 이웃 간 주민들의 갈등도 깊어진 상태다. 송전탑 반대 대책위는 공사가 갑작스레 진행되자 법원에 공사 중지가처분 신청을 냈다. 이에 송전선로 이전을 맡은 시공사는 주민 대표 일부를 업무집행 방해로 고소했다.
시공사에 위탁을 준 목화연립조합과 송전탑 반대 주민들은 모두 송전탑 지중화를 바란다는 점에서 뜻을 같이 하고 있지만, 지자체의 안일한 대처로 감정의 골만 깊어지고 있다.
밖으로 나오니 한켠에 앉아 있는 아저씨들이 담배를 태우고 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달 이상 기약 없는 농성을 이어가니 답답하기도 할 터다.
반대편 능선에 송전선로가 새로 이어질 송전탑이 보인다. 송전선로 왼편에는 부평문화예술회관이 막바지 공사중이고, 오른편에는 백운초등학교와 축구장이 보인다. 바로 선로가 지나가는 아래는 백운초교 학생들이 통학로로 이용하는 길이 있다.
돌아가는 길, 백운초에 다니는 한 아이(5학년)와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다.
"송전탑은 아마 전교생이 다 알 거에요. 송전탑이 오면 땅 값이 떨어진다고 해요. 애들 건강도 안 좋아진대요." 아이다운 솔직한 대답이다.
전국적으로 송전탑 지중화가 지역 주민들의 숙원 사업으로 진행되는 지금, 멀쩡한 동네에 345kV의 고압전선이 놓인다고 하니 어느 누가 가만히 앉아 있을까. 하루빨리 해결돼 '주민들의 사랑방'이 다른 곳으로 옮겨지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