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환경보호단체 그린피스의 에스페란자호 항해사 김연식씨와 함께 하는 <위대한 항해>는 지난해 3월부터 연재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환경감시 선박 에스페란자호에서 부딪치며 겪는 현장의 이야기를 한국인 최초의 그린피스 항해사의 눈으로 보여드립니다.
그린피스에서 일한 지 이태 째다. 이 단체에서 일하는 좋은 점을 꼽으라 하면 보람이나 값진 경험, 오지 탐사 등을 떠올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난다는 점을 내세운다.
좋은 사람에는 선한 사람, 똑똑한 사람, 솔직한 사람, 열정적인 사람, 따뜻한 사람, 경험 많은 사람 등 다양한 부류가 있다. 그 중에서도 나는 한 분야에서 두드러지는 대가(大家)들에 대해 말하고 싶다. 보통 사람인 내가 평생 만나지 못할 한 분야의 대가들과 생활한다는 점이 좋다. 더 정확하게는 대가들의 민낯을 본다는 것이다. 그 민낯을 조금 설명해보자.
# 닉 코빙(Nick Cobbing)
지난해 북극에 갔을 때 만난 영국인 사진가.
전 세계 극지를 다니며 자연경관을 담아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BBC방송 등에 제공하는 베테랑.
타임(Time)지와 뉴스위크에서 올해의 사진가로 선정되는 등 유럽과 영미 지역에서 실력을 인정받음.
이렇게 설명하면 대단히 거창하고 진지할 것 같지만 그의 일상은 정반대다. 늘 뒤통수에 까치집을 달고 다니고, 텅 빈 눈으로 터벅터벅 걷는다. 그런 꼴로 종종 얼토당토한 말을 하니 사람들을 웃기기 일쑤다. 한번은 새벽에 혹등고래를 발견해서 그를 깨우러 갔는데, 어찌나 깊이 자는 건지 문을 발로 차도록 일어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정신을 놓고 산다.
작가의 그런 면을 알고 나서 작품을 보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지구의 절경을 훌륭하게 담았다. “저 느림보 까치집이 이런 사진을 찍었단 말이야?”, “과연 대가는 품 안에 발톱을 숨기며 사는 것인가?”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엔가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번쩍 날카롭게 사진기를 드는 작가를 보면서 “저 사람이 사진가이긴 하구나”싶었다. 작가의 외모나 행동거지는 작품과 상관관계가 없는 모양이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사진을 제공하는 독일 출신 사진가 율리 쿤즈(Uli Kun)가 귀마개를 엉뚱하게 쓰고 익살스런 춤을 추고 있다.>
# 후안(Juan)
국제 뉴스 통신사 로이터(Reuter)의 사진기자.
55세 배 나온 대머리 아저씨. 늘 다리를 쩍 벌리고 다님.
그러다 사람을 만나면 원숭이 흉내를 내며 끝내 웃기고야 맘.
웃길 때까지 바보짓을 하니 웃어 줘야 할 때가 많음.
자주 졸고, 더 자주 빈둥거림.
늘 장난감 같은 사진기를 목에 메고 다님. 사진기자들이 쓰는 커다란 사진기는 가져 온 건지, 잃어버린 건지, 원래 없는 건지 모르겠음.
그러고도 좋은 보도사진을 찍는 게 신기함.
대충 이렇다. 사진가 뿐 아니라 교수, 다이버, 비행기 조종사, 심지어 유명한 배우와 작곡가까지.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한 달이 넘게 환경감시선에서 같이 지내는데, 대다수가 근엄이나 진지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유쾌하고 때로는 바보 같기까지 하다.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했고, ‘잘하는 사람이 오래 남는 게 아니라, 오래 남는 사람이 잘하는 것이다’라고도 했다. 가까이 여유롭고 재치 있는 대가들을 만나면서, 일에 악착같기 보다는 주변에 있는 동료들과 함께 하루하루를 즐기며 제 보폭으로 꾸준히 걷는 게 한 분야에서 무언가를 이뤄내는 비결이 아닌가 싶다.
여유와 재치를 배우는 게 여기서 일하는 가장 좋은 점이다.
(우유를 먹지만 키는 크지 않고, 재치를 배우지만 늘지는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