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
그 어린애를 치어 죽인 운전수도
바로 저구요,
그 여인을 교살한 下手人(하수인)도
바로 저구요,
그 銀行(은행) 갱 逃走犯(도주범)도
바로 저구요.
<2행 생략)>
실은 지금까지 迷宮(미궁)에 빠진 사건이란
사건의 正犯(정범)이야말로
바로 저올시다.
범행 동기요, 글쎄?
가난과 無知(무지)와 역사와 惡循還(악순환),
아니, 저의 안을 흐르는 카인의 피가
저런 죄를 저질렀다고나 할까요?
저런 악을 빚었다고나 할까요?
이제 기꺼이 포승을 받으며
조용히 絞首臺(교수대)에 오르렵니다.
최후에 할 말이 없느냐구요?
솔직히 말하면 죽는 이 순간에도
저는 최소한 4천만과 共犯(공범)이라는
이 느낌을 버리지 못해
안타까운 것입니다.
<감상>
이 시를 읽으면 시가 읽히는 것과 동시에 신앙이 읽히는 것입니다. 구상 시인은 독실한 가톨릭 시인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화가 이중섭, 걸레스님 중광, 공초 오상순 시인을 비롯하여 많은 정계, 재계, 문화계 인사들과 교류하였지만 사형수에게도 따뜻한 시선을 보냈는가 하면 장애인 문학단체에 거금을 기부하는 등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기도 했습니다. 이 시는 시인의 많은 고백시중의 하나입니다.
이 시가 쓰여질 무렵에도 그렇겠지만 요새는 더욱더 끔찍한 사건이 온 세상을 공포로 몰아넣고 세상 사람들을 전율케 하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에게서 하느님을 발견하듯 우리는 세상의 무서운 범죄자에게서 또 자기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스스로 전율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도 저런 흉악한 악이 도사리고 있음을 무의식중에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글을 쓴 시인과 평범한 독자인 우리가 다른 것은 이 시인은 온갖 범죄의 주범이 바로 자기라고 고백하고 우리는 모른체 하고 발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도 우리 이웃이, 동시대의 사람이. 같은 하느님의 창조물이 저런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것은 바로 내가 저지른 것과 같다는 데까지 시인은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을 통하여 우리는 간접적으로 우리의 죄악을 시인하게 되고 비로소 억압되어 있던 자아에서 벗어나게 되고 새로운 성찰의 계기를 갖게 됩니다. -최일화
*구상(具常): (1919~2004) 함경남도 원산 출생. 1946 북한 원산에서 시집《凝香》에 작품이 수록되어 필화를 입음. 월남하여 1951 시집《具常》 발행을 필두로 가톨릭 신앙을 기반으로 한 많은 작품을 남김. 경북 왜관에 '구상문학관'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