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김주희 기자
화도진 군영.
화도진을 지키던 병사는 온데간데 없고
동네 주민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한가롭다.
화평동의 앞은 바다였다. 지금은 매립돼 공장과 집이 들어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분명 바다였다.
조선시대 말 그 바다를 지키던 곳이 바로 화평동이다.
조선말엽, 인천 앞바다에 이양선이 자주 출몰하자 조선 정부는 화도진에 '방어사령부'를 두게 된다.
이즈음 충청도 차인현 월하보에서 일본 군함 천성호가 서해안 탐사를 한창 벌이고 있었다. 앞서 3년 전에는 일본의 운양함의 포격으로 영종진이 파괴되는 일이 있었다.
서울로 향하는 뱃길의 진입로였던 인천과 부평 연안의 중요성은 부각됐고, 고종은 어영대장 신정희에게 화도진 축조를 명했다.
1878년 8월27일 강화에서 가져온 돌로 공사가 시작됐다. 공사는 화도진과 함께 현 서구 연희동에서 진행됐다.
고종이 직접 이름까지 지어 '화도진'이라 했던 이곳은 이듬해(고종 16년, 1879년) 완공됐다. 묘도(현 만석동) 북변포대와 호구(논현)포대 등 인천의 해안선 방어를 위해 설치한 포대의 '야전사령부' 구실을 했다.
국권을 수호하려는 고종의 의지는 그러나 끈질긴 압력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고종 17년인 1880년 인천이 강제 개항을 맞았다.
이듬해 미국은 신미양요로 알려진 대로, 군함 5척을 강화에 보내 무력시위를 벌이며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하고 나섰다.
화도진 동헌에는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모습을 재현해 두었다.
강력한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통상조약을 맺지 못한 미국은 청나라 이홍장을 앞세워 조선과 수호조약체결을 추진한다.
결국 고종 19년(1882년) 5월22일, 고종의 전권대신 신헌과 군함을 앞세운 미국 스와타라호 함장 슈펠트 제독이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인천시사에 실린,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화도진 언덕에서 진행된 한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과정은 이러했다.
"한미수호통상조약은 고종 19년 (음력)4월6일 화도진 언덕 천막 안에서 체결됐다. (중략) 미국 국가 합창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10시48분 한문 3통, 영문 3통으로 된 전문 14조의 조약문에 양국 대표가 조인, 서명완료하자 신호를 받은 스와타라함이 21발의 축포를 발사하여 천지를 진동하게 했다."
천지를 진동하는 축포 소리는 그러나 화도진에는 운명이 다했다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고종 21년 5월 화도진은 친위전영이 되고, 다음해 6월 좌영으로 이속됐으며, 고종 31년 갑오개혁에 맞물려 폐쇄됐다.
화도진 진지 역시 화재로 소실됐고, 주변 지역도 매립으로 인해 자취가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
1983년 5월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해 화도진 자리에 표석비를 세웠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조약 체결 장소가 화도진이 아닌, 중구 항동 옛 영국영사관 자리인 파라다이스인천호텔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어, 시는 파라다이스 호텔자리에도 표석을 세웠다.
피난민이 모여 살던 역사의 현장 화도진이 지금의 모습을 갖춘 때는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 인천시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화도진도(花島鎭圖)를 기본으로 복원했다.
안주인의 거처인 내사(內舍), 수령이 일을 보던 동헌(東軒), 화도진의 병사들이 사용하던 사랑채, 그리고 당시 무기와 집기류를 볼 수 있는 전시관과 야외전시관을 두었다.
화도진은 인천광역시기념물 제2호로 지정돼 있다.
화도진은 역사의 현장이자 주민들의 쉼터로 사랑받고 있다.
화도진은 이제 소나무와 정자, 벤치 등으로 잘 꾸며놓은 공원으로 만들어 주민들의 쉼터로도 사랑받고 있다.
인천시 동구는 20년째 매년 5월 화도진공원에서 축제를 연다.
화도진의 역사는 개항의 역사와 맞물린다. 그런 개항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 화도진도서관이다.
화도진공원과 맞닿은 도서관 2층에는 향토개항문화자료관이 있다. 이곳에는 인천의 개항과 관련한 자료와 역사, 문화, 통계, 논문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문화관광체육부가 지정한 특화자료실이다.
화도진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