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하우스. 남녀를 불문하고, 인천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는 장소다. 미국의 유명한 국립공원,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인 옐로스톤은 바위가 노랗기 때문인데, 옐로하우스는 집 벽이 노란가? 그랬다고 한다. 1900년대 초 인천항에서 일본인을 대상으로 영업하던 홍등가가 1960년대 숭의동으로 집창촌을 형성하며 이전했고, 성매매업소의 외벽을 노란 페인트로 칠해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한데 지금 옐로하우스는 폐쇄를 앞두고 있다.
소설가 황석영은 1973년 《신동아》에 발표한 <삼포 가는 길>에 옐로하우스를 언급했다. 달아나던 술집 작부는 자신을 잡으러 온 걸로 오해하며 떠돌이 노동자에게 퍼붓는다. “이거 왜 이래? 나 백화는 이래봬도 인천 노랑집에다 대구 자갈마당, 포항 중앙대학, 진해 칠구, 모두 겪은 년이라구!” 백화가 첫째로 언급한 옐로하우스는 한때 90여 업소가 밀집할 정도로 성황이었지만 2000년 이후 쇠락의 길을 걸었다. 단속도 거칠었지만 풍선효과로 성매매가 은밀하게 분산되면서 호색한의 발길이 뜸해졌다.
숭의동에 인천지하철 2호선의 정거장이 들어선 이후 인천시 정책담당자에게 눈의 가시가 된 옐로하우스는 철거대상이 되었고 결국 지상 40층 규모의 주상복합아파트로 변신하다고 언론은 최근 전했다. 말 못할 사연을 가진 종사자들은 주거비와 직업훈련비의 지원을 받으며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할 모양인데, 별칭으로 소통되는 은밀한 장소, 옐로하우스의 기억은 말살되어도 상관없을까? 엄연히 불법이고 감추고 싶으니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할까? 그런다고 쉽사리 지워지는 기억도 아닌데.
전주시의 선미골은 달라 보였다. 1981년 전주역이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시 청사가 들어서자 철길 너머에서 성업하던 집창촌 선미골은 퇴출대상이 되었다. 전주시는 강제력을 동원하지 않는다. 시민들이 즐겨 찾는 예술촌으로 바꾸려고 선미골에 특화거리를 조성하지만 과정을 시민들과 자유롭게 공유한다. 영업을 포기한 건물이 나오면 시에서 매입하지만 원형을 보전한다. 보전한 건물을 전주시는 시민단체의 활동공간과 젊은 예술가의 창조공간으로 제공하는 그치지 않는다. 내부를 오롯이 남기며 기억의 장소로 보전하려는 노력을 병행한다.
집창촌을 예술촌으로 변화하려는 전주시의 노력은 팔복예술공장의 성공에서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1971년부터 20년 동안 가동된 팔복동의 카세트테이프 공장은 400여 여공에게 가혹했다. 1988년 400일이 넘는 노동쟁의가 이어졌고 1991년 결국 공장이 폐쇄돼 25년 이상 방치되었지만 올 3월 이후 예술인의 공간으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예산과 근사한 기획이 뒷받침된 결과로 판단하면 함량미달이다. 쓰라렸던 기억을 당시 노동자와 상기하며 기억의 장소를 예술과 문화의 장소로 승화할 수 있기에 가능했다. 전주 시민들이 반긴 것은 물론이다.
“단순한 리모델링이 아니라, 한편의 독립영화처럼 서사시를 쓰고 다큐멘터리를 찍는 마음”으로 헌신한 팔복예술공장의 황순우 총괄기획자는 인천 토박이다. 인천에서 건축가로 활동해온 그는 흉물로 허물어지던 외관을 살린 공장의 내부를 예술인들의 창작 공간으로 바꿨다. 여공의 애환이 어린 화장실과 높은 창틀의 기억을 보전했고 그 과정을 기록했다. 전주 시민은 물론이고 한국 주재 외교관까지 찾아와 감탄하는 팔복예술공장의 사례는 폐공장이 수두룩한 인천에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다.
일반화를 기다리는 경인고속도로의 가좌 구단은 한동안 북적였지만 요즘 적막하다. 인하대학교와 가까운 동양화학부지는 시민에게 기억을 남기는 인천의 장소다. 해마다 10조 예산을 운용하는 300만 인구의 인천이지만 창작공간이 없는 젊은이들은 서울로 향한다. 능동적인 그들에게 창작의 기회를 제공할 공간은 충분한데, 전주가 부러운 건 왜일까? 매립 예정인 북성포구 때문일까? 주상복합건물로 속절없이 바뀔 옐로하우스는 어떤가? 그 기억은 보전 가치가 없나? 지워야 할 악몽인지, 황석영에게 물어보아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