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고개'의 기억은 정겹기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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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고개'의 기억은 정겹기만 하고…
  • 김주희
  • 승인 2011.02.10 17: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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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발 따라 … 인천新택리지] 동구 송림4, 6동(19)

취재: 김주희 기자


송림4동 언덕배기에서 바라본 송림4동과 6동 전경.
사진 아래 재개발이 멈춘 송림4동과 고층아파트가 들어선
오른쪽 상단 8번지 모습이 확연히 구분된다.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고갯길을 올랐다. 아주 가파라 차도 오르지 못하는 그 고갯길을 나이든 이들은 '아리랑 고개'라고 불렀다. 꼭대기에 오르면 숨이 차고 어지러울 정도로 힘에 부쳐 그렇게 불렀다고 했다. 숨을 헐떡이며 고갯길을 넘던 사람들의 힘겨운 삶을 고스란히 담았지만 왠지 정겹다.

정겨운 이름을 단 고갯길은 너댓 개나 더 있다.

활터가 있었다고 해서 '활터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 역시 가파른 오르막길이라 '헐떡 고개'라고도 불렀다. 밭에 뿌린 똥거름 냄새와 똥파리가 많다고 해서 이름을 붙인 '똥고개'는 미소를 짓게 한다.

이 똥고개를 행정기관이 '황금고개'(사거리)로 '부티'가 나게 바꿨다고 하는데, 어째 부르고 듣기가 민망스럽기만 하다.


'아리랑 고개'라고 부른 고갯길을 따라 오른쪽 천광교회에서 내려다 본 송림6동.
길은 샛골로를 건너 수도국산으로 이어진다.

송림6동은 송림오거리에서 대주중공업까지 난 샛골로를 사이에 두고 송림2동과 마주하고 있다. 수도국산 달동네 송림2동과 마찬가지로 송림6동 역시 인천에서 대표적인 달동네를 끼고 있다.

아리랑 고개를 헐떡이며 걸어올라 고갯길 꼭대기에 높이 선 천광교회에 다다르니 동구 일대가 빙 둘러 눈에 들어온다. 서쪽으로 수도국산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남구 도화동 옛 선인재단과 송림4동 주거지역이, 그리고 남쪽으로는 재능대학과 송림6동 주거지역이 자리를 잡고 있다. 북동쪽으로는 현대제철과 대주중공업, 인천산업용품단지가 넓게 펼쳐졌다.

낯선 이의 등장에 천광교회를 혼자 지키던 백구가 컹컹 짖어댄다. 우렁차게 '개소리'가 온 동네를 울리는데도 고갯길엔 인적이 없다.

한숨을 돌리고 찬찬히 올라온 고갯길을 더듬어 내려본다.

언덕길을 따라 갈래갈래 난 좁은 골목길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개발 바람이 휑하니 불었는지, 좁은 골목을 마주하고 다닥다닥 붙은 흰 담벼락에는 붉은색 페인트로 그려놓은 동그라미와 '완'자라고 쓴 글자가 선명하다. 보상을 마친 집이려니 했다. 사는 이가 없어 방치돼 지붕이 뚫리고 벽이 무너진 빈집도 군데군데 보인다.


흰 담벼락에 붉은색 페인트로 쓴 '완'자가 선명하다.
골목길 끝자락 너머 8번지 고층아파트가 눈에 들어온다.

골목길을 따라 송림4동 '8번지'로 향했다. 수십 년을 인천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인천의 대표적 달동네로 꼽는 곳이 수도국산과 똥고개, 그리고 8번지다.

특히 8번지는 주먹깨나 쓰는 '깡패 소굴'로 악명이 높았던 동네로도 기억되는 곳이다.

이 8번지에서 옛 인천교로 향하는 고갯길을 활터고개라 불렀다. 조선시대 이곳에서 지금의 도화동 쪽으로 활시위를 당겼던 활터가 있었다. 송림4동과 이후 분동된 송림6동을 통틀어 부른 옛 지명이 활 '弓'자와 고개 '峴'자를 써 '궁현동'이라고 했다. 재능대학이 들어선 부처산(또는 부채산) 인근과 송림2동에도 활터가 더 있었던 것으로 토박이들은 전한다.

이 활터고개에는 아카시아 나무가 숲을 이룰 정도로 많았고,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군의 요새가 있었다고도 한다.

아카시아 숲은 6·25 한국전쟁 이후 피란 온 사람들의 정착지가 됐다. 고갯길을 따라 빼곡하게 판잣집이 들어섰다. 이후 활터고개는 8번지 사람들이 숨을 헐떡이며 고갯길을 넘어 주안염전으로 오갔다고 해서 자연스레 '헐떡고개'라고 고쳐 부르게 됐다.


개발 탓인 듯 집주인이 떠난 빈집의 지붕이 뻥 뚫렸다.
주변에 벽이 무너지고 대문도 없는 빈집도 더 있었다.

여느 달동네가 그러했듯이 8번지 일대에도 집집마다 화장실이 없는 탓에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고 한다. 심지어 언덕 윗동네에서 아랫동네로 굳은 똥덩어리가 굴러 내려왔다는 기억까지 있으니,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8번지 아랫동네 대주중공업 담벼락 맞은편에 지금은 없어진 '분뇨처리장'도 있었으니, 똥과 얽힌 사연이 많은 동네다 싶다.

그래서 (8번지)'똥고개'라고도 불렀는지 모르지만, 원래 동구 사람들이 '똥고개'라 부르던 곳은 서흥초등학교 인근에서 수도국산으로 난 오르막길을 말한다. 이 길을 따라 송림동 사람들은 만석동으로 갔다.

수도국산 끝자락에 있는 버려진 땅에 가로질러 난 이 똥고개를 따라 호박과 복숭아 등을 키우는 밭이 널려 있었다. 그 밭에 준 똥거름 냄새가 코를 찌를 듯 고약해 '똥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농부들이 똥거름을 지고 이 고갯길을 오르다 흘린 인분 때문이란 설도 있다.

점잖지 않은 지명인 건 분명하나 새 주소체계에 따라 도로명을 정하며 현 송현아파트 앞 사거리를 '황금고개 사거리'라고 한 것보다는 오히려 정겹고 사람냄새를 물씬 풍긴다.


'황금고개' 사거리에서 송림삼거리로 난 신작로를 사이에 두고
재개발로 들어선 고층아파트와 개발을 추진 중인 단독주택 지역이 마주 보고 있다.

어찌됐든 이 황금고개 사거리에서 송림삼거리까지 신작로가 뚫렸다. 구불구불 얽히고설킨 좁은 골목길도 삭둑 잘려 신작로로 됐다. 인중로를 따라 8번지 일대는 재개발돼 어느새 번듯한 아파트 단지로 변했지만, 맞은편 천광교회 일대는 여전히 고단한 모습이다.

 병풍처럼 서 있는 고층 아파트를 등지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 다시 천광교회로 나왔다. 또다시 개 짖는 소리가 조용한 동네를 울린다. 백구가 짖으니 집 지키던 다른 녀석들까지 덩달아 컹컹댄다. 한 차례 쏘아봤지만 기세가 줄어들지 않는다. 빨리 벗어나는 게 상책이다.

가파른 언덕을 조심스레 내려와 샛골로 194번길로 접어드니 양 편에 자리 잡은 집모양이 천편일률적이다. 연립주택가 골목길에서 축구를 하던 초등학교때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역시 개발 바람이 인다. 재개발을 추진하는 조합의 플래카드와 한 건설사의 새해 인사 현수막이 걸려 있다. 늘 그렇듯 조합의 반대편에 선 비상대책위 사무실도 눈에 띈다.


송림3-1지구 재개발조합이 내건 현수막이 눈에 띈다.
이 현수막 건너편에 비대위 사무실이 들어서 있다.

서흥초등학교 앞은 연립주택이 들어서기 전에는 채소밭이었고, 양배추를 주로 심었다고 한다. 서림초등학교까지 난 개천은 복개돼 지금은 인근 상가와 현대시장을 찾는 이들이 주차장으로 쓰고 있다.

현대시장은 인천에서도 제법 규모가 큰 시장이다. 동부시장과 궁현상가, 송육상가, 중앙상가, 원예시장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 농산물도매시장 노릇을 하던 동부시장은 '깡마당'이라고 불렀다. 시장 한복판에 넓게 마당이 펼쳐져 있어 장이 파한 오후에는 원숭이와 차력사를 앞세운 약장수가 회충약 등을 팔기도 했다. '애들은 가라'던 약장수의 울림이 귀에 쟁쟁하다.

송림로를 낀 데다 교통편이 좋아 아직도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다.


예전 '깡마당'이라 불렀던 동부시장(현대시장)에서 약장수 공연이 또다른 볼거리였다.
지금은 지붕을 씌우고 바닥을 정비해 깨끗해진 모습이다.

이 현대시장에서 물건을 팔던 이들 중에는 멀리 '개건너'에서 인천교를 넘어 온 이들도 있었다. 개건너는 지금의 서구와 부평구 일대를 말하는데, 개(갯벌) 건너에 있는 곳을 뜻한다.

1958년 1월17일 인천교를 세우기 전까지 개건너 사람들은 배를 타 갯고랑을 건너와 다시 헐떡고개(활터고개)를 넘어 인천으로 와 싱싱한 채소 등을 팔았다고 한다.

이들이 동구 송림동과 서구 가좌동 사이에 난 갯골을 건널 때 이용하던 곳이 '번지기(또는 번자기) 나루'다.

인천교까지 그 흔적이 사라진 지금, 어디가 번지기 나루터였는지 정확히 짚어낼 수는 없다. 다만 인천교 바로 옆과 조금 떨어진 두 곳에 나루터가 있었다는 것은 옛 사진과 토박이들의 기억으로 더듬을 뿐이다.


1953년경 '번지기 나루터'다. 주한미군으로 인천에 주둔해 있던 필명 'frankeds31'이 찍었다.
사진 오른쪽 상단에 징검다리가 있다.(사진=blog.naver.com/kkkk8155)


이 사진 역시 필명 'frankeds31'이 찍은 것으로, 현 재능대학이 있는 부처산에서 북동쪽을 담았다.
예전 주안염전 모습이 선명하다. 블로그 '인천의 어제와 오늘'을 운영하는 김식만씨는
산 아래 마을이 매골로 불린 곳으로 추정한다. 또 염전저수지 오른쪽에 인천교가 들어섰을
것으로도 보았다. (사진=blog.naver.com/kkkk8155)


송림동 8번지의 모습을 담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위 두 장의 사진과 마찬가지로 1953년경 찍은 것이다.
부처산에서 북서쪽을 담은 것이다. 사진 중앙 언덕이 8번지 쯤이고, 뒷편 갯벌은 공장지대로 됐다.
사진 왼편 아래쪽 한 군인이 다른 풍경을 사진에 담고 있다. (사진=blog.naver.com/kkkk8155)

번지기 나루는 처음에는 개인이 경영하다가 인천부로 넘어가게 됐고, 다시 부천군 서곶면에서 경영해 오다가 인천교를 가설하면서 폐지됐다.

신태범 박사는 '인천 한 세기'에서 "쑥골 동산을 넘으면 번지기 나루가 있는 주안염전 갯고랑이 나온다. 갯고랑 너머가 개건너라고 하는 서곶이다. 번지기 나루에는 나룻배 대신 웅장한 인천교가 걸려 있고 개건너 일대 야산은 공장 지대로 변하고 있다."라고 전한다.

번지기란 말은 서구 석남동의 옛 지명에서 유래됐다. 석곶면 번작리(番作里)란 마을에 해안감시 초소가 있었다. 이 마을 사람들이 순번을 정해 해안을 지킨 것이 마을의 이름으로 됐고, 이후 부르기 편하게 '번지기'라 했다고 전한다.

이 번지기에 나루가 있어 개건너 사람들이 인천으로 통행할 때 이용했다. 웃나루와 아랫나루 두 곳이 있었다. 웃나루는 밀물 때면 배로 건너고 썰물 때면 돌다리로 건너, 아랫나루보다 뱃삯이 쌌다.

그렇게 힘들게 건너던 갯고랑은 매립돼 인천시의료원과 인천산업용품유통단지 등이 들어선 공장지대로 됐다.


'인천교자동차매매단지'란 표지판이 이 곳이 예전에 다리였던 '인천교'임을 짐작케 할 뿐이다.
다리 양쪽 매립된 갯벌 위에 어린이교통공원과 체육공원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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