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출발지를 찾는 '여정의 시작'
상태바
인천 출발지를 찾는 '여정의 시작'
  • 김주희
  • 승인 2011.03.03 18:11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길 따라 발 따라 … 인천新택리지] 남구 숭의1·3동(21)

취재: 김주희 기자


경인철절을 따라 난 숭의1·3동. 쇠뿔고개 정상 부에 알렌 별장 터에 선 전도관 건물이 눈에 띈다.

송림3·5동을 끝으로 동구 이야기를 마친 '길 따라 발 따라 인천新택리지'는 앞으로 남구 이야기를 펼친다.

인천의 역사는 남구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천시 남구는 백제를 건국한 온조의 형 비류가 세운 나라 '미추홀'이 있던 곳이자, 인천(仁川)이란 지명의 출발선이 된 곳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많은 왕비를 배출한 지역이기도 하며, 조선시대 인천의 행정을 관할하던 인천도호부 청사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오르면 남구 곳곳에서 발견된 고인돌이 선사시대 이 지역에 상당수 부족공동체가 형성돼 있었음을 증명한다.

근대기 '염전'으로 더 잘 알려진 곳이고, 덜 알려졌지만 도자기 산업이 번성하던 곳이기도 하다. 인천대와 인하대 등이 있던 고등교육의 산실이자, 1980년대 민주화의 불을 지핀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첫 고속도로의 시작점이 있고, 수출 산업이 둥지를 튼 곳이 또한 남구이다.

이런 남구의 이야기를 숭의동 산107번지(우각로 143-9)에 버티고 선 '전도관'으로 더 잘 알려진 '한국예루살렘 교회'에서 시작하려 한다.

 


미국 공사 알렌의 별장이 있던 터는 학교로 쓰이다 교회에서 공장으로, 다시 교회로
파란만장한 역사를 거쳤다. 지금은 주변 지역 재개발사업으로 철거될 처지에 놓인 빈 건물이다.

한국 최초 철도 기공지 표지석이 있는 경인전철 1호선 '도원역'에서 창영동을 마주하고 난 우각로를 따라 '쇠뿔고개'를 올라 다다른 정상부에 '한국예루살렘교회'가 있다.

이 교회 건물은 기독교 계통의 신흥 종교로, 교단에서는 이단 논쟁이 이는 '천부교'의 원류인 '전도관'이 세운 예배당이다.

지금은 쓰지 않고 철문을 굳게 닫아 출입할 수 없는 (인천)전도관은 평안북도 출생 박태선 장로가 건립했다.

천부교 홈페이지에 나온 인천전도관의 개관일은 1956년 1월12일이다. 이때는 중구 전동에 자리한 것으로, 숭의동 교회가 준공된 때는 1956년12월28일이다.

본디 전도관 터는 미국 공사이자 의료 선교사로, 또한 고종의 주치의로 활동한 알렌의 별장이 있던 곳이다. 알렌 별장은 알렌이 한국을 떠난 뒤 주인이 여러 번 바뀌다 화재로 소실된 뒤 박 장로가 땅을 사들여 그 자리에 전도관을 세운 것이다.

故 최성연 선생의 '개항과 양관역정'에 따르면 박 장로는 한 은행 경매로 내놓은 이 부지를 250만환(圜)에 낙찰했다.

인천전도관은 1955년 1월12일 전동의 어느 창고에서 시작했는데, 1년여 만에 신도가 1만 명에 이르렀다고도 했다.

박 장로는 1956년 10월에 화재로 부서진 별장을 헐어낸 뒤 공사를 시작해 크리스마스 직전까지 교회 등 300평을 우선 건축하고, 이듬해에 종각과 2층을 증축했다고 한다.

이 책과 천부교 홈페이지 기록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전도관은 이 마을 어디에서도 볼 수 있다.
지역에 오래 산 노인들은 전도관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인천전도관이 인천에서 포교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도 수가 급증했다. 지역 주민들은 전도관 공사에 신도들이 대거 참여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특히 노인들은 전도관에서 벌인 독특한 예배 방식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데, 박 장로가 예배를 보면 천정에서 번개가 치듯 번쩍번쩍 빛이 났다고 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영화의 특수효과처럼 어떤 기계장치를 써서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짐작할 뿐이라고들 했다.

사방팔방 전도관으로 난 길을 따라 줄지어 언덕을 오르던 신도들은 반지나 목걸이를 성금으로 내기도 했다고 전했다. 전도관은 1978년 이 곳을 떠났다.

주민들은 한 돈 많은 서울 사람이 병원을 짓기 위해 전도관을 샀지만 흐지부지됐고, 이후 기숙사까지 있던 봉제공장인가, 신발공장이 있다가 지금의 한국예루살렘교회가 들어왔다고 기억했다.

한국예루살렘교회는 이초석 목사가 1984년 9월 경기도 광명시에서 개척한 교회이다. 역시 기독교계에서는 이단 논쟁이 일고 있다. 지금은 예수중심교회로 이름을 바꿨다.

신도를 태운 버스로 골목길을 가득 채웠던 한국예루살렘교회는 2005년 6월 서구 가좌동으로 이전(예수중심신학교)하기까지 20여 년간 숭의동 산107번지에 있었다.

'전도관'은 이후 빈 건물로 남아 있다.

처음 이 터에 별장을 진 알렌이 스크랜톤에 이어 한국에 두 번째로 온 의료선교사였으니, 이단 논쟁은 차치하고 알렌 별장에서 '전도관'으로, 다시 '한국예루살렘교회'로 이어진 인연의 고리가 참 묘하다 싶다.

이 알렌 별장 터에 전도관이 들어서기 전까지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이완용의 아들 용구가 1907년 알렌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 이 건물을 별장으로 썼다. 이후 일본인 등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뒤 1936년 이화여전 출신의 이순희·성희 자매가 사설 강습소인 '계명학원'을 세웠다.

계명학원은 부르기 쉽게 '개미학원'이라고도 했는데, 후에 일제의 강제소개 정책에 따라 없어지고 학생들은 신흥과 축현학교로 분산 배치됐다.

해방 전후로는 경찰전문학교, 중앙대학교, 무선고등학교 등이 알렌별장을 사용했다.

굳게 닫힌 전도관을 뒤로 하고 산 아래로 내려와 숭의시장삼거리로 향했다. 알렌은 비단 알렌별장만으로 인천과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은 아니어서다.

알렌이 미국 공사로 있던 1897년 3월22일 한국 최초의 철도 기공식이 열렸다. 당시 이 철도 부설권을 따내기 위한 일본과 미국 등 열강이 각축을 벌였는데, 고종 황제는 미국인 모스의 손을 들어줬다. 알렌은 당시 고종의 주치의였다.

경인철도 부설 당시만 해도 '우각역'이 있었는데, 박문로터리 진로아파트(동구 송림3·5동)가 그 자리다. 경인철도 직선화 계획으로 지금은 사라졌지만, 모스는 부설 당시 알렌별장 인근에 역을 세운 것이다.

모스는 그러나 자금이 달려 결국 부설권을 100만 달러에 경인철도인수조합에 넘겼고, 이 조합은 후에 이를 경인철도합자회사에 되넘겼다.

이후 경인철도는 일본인 지주들의 반발로 당초 우각역에서 숭의로타리를 거쳐 인천여상 남쪽에서 인천역으로 잇겠다는 계획을 수정해 지금의 전철 노선의 모습을 띄게 됐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한국철도 역사에도 알렌이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것이다.


도원역 인근에 서 있는 한국철도 최초 기공지 표지석.

현재 한국철도 최초 기공지 표지석은 도원역과 숭의시장 사거리 사이에 알렌별장 터를 올려다보며 서 있다.

이 표지석에는 동쪽으로 400m 더 간 지점이 정확한 기공식 자리라고 쓰여 있는데, 그대로라면 참외전로를 따라 남구청 입구 삼거리 못 미친 목공예거리 근방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많은 이야기를 담은, 국내 기독교 역사의 시작점을 함께 한 알렌별장 터의 '전도관'은 '전도관2구역도시환경정비사업' 대상지에 포함돼 얼마 후면 사라지게 된다.

역사의 한 장을 차지할 만한 수많은 건물이 개발이란 명목으로 아무런 보존 조치도 없이 사라졌듯 말이다.

발길을 돌려 석정로를 따라 숭의로터리로 향했다. 참외전로를 건너니 바로 올 8월 완공을 목표로 공사가 한창인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이 나온다. 프로축구 인천유나이티드가 전용구장을 쓸 축구장이다.

축구장과 야구장을 갖춘 공설운동장으로 불리며 인천 스포츠의 산실이었던 곳으로, 앞으로 프로축구 인천유나이티드가 전용구장을 쓸 축구장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운동장을 짓기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개발이란 이름으로 대단위 주상복합건물이 경기장 주변에 함께 들어설 예정이다.

그런데 이 축구장이 공사 시작 때부터 입방아에 자주 올랐다. 개발 논리로 인천 스포츠의 역사를 사라지게 한 것도 그러려니와 돈 문제로 공사가 번번이 중단되기도 했다.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앞 버스정류장이 가리키는 명칭이 제각각이다. 앞으로는 어떤 이름을 달게 될지?
남구와 중구의 관할권 다툼이 이는 현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해 씁쓸하다.

최근에는 경기장 운영에 따라 예상되는 적자를 보전하려고 축구장 설계 때부터 들이기로 한 'SSM' 문제가 불거졌다.

남구와 주변 상인들의 반발이 거셌는데, 얼마 전 원만한 해결점을 찾으려고 시와 시행사, 그리고 남구와 주변 상인, 시민 등이 참여하는 소위원회가 구성됐다.

이를 잘 넘기는가 했더니 이번에는 사업대상지 행정 관할권을 놓고 중구와 남구가 대립하고 있다. 이 축구장이 중구 도원동과 남구 숭의동에 걸쳐 있어 그렇다.

숭의운동장 도시개발사업 부지의 총 면적은 9만70.2㎡. 이 중 중구 관할 땅이 50.9%이고, 나머지는 남구 관할이다. 축구전용경기장은 67%(4만1천816㎡)가 중구 관할이고 나머지 33%는 남구 몫이다.

주상복합건물과 축구장이 들어서면 세수가 늘어나니 중구와 남구에선 욕심이 날 수밖에 없다. 서로 사업이 마무리되면 사업지구 전체의 관할권을 요구하고 있다.

중구는 사업 부지 면적이 많다는 이유를 내세우고, 남구는 사업초기부터 행정 처리를 했고 '숭의운동장'이란 명칭을 오래전부터 써왔다는 이유를 각각 들고 나왔다.

사업 구상단계부터 정리했더라면 행정구역 조정 문제가 지금 불거지지 않았을 것을, 인천 스포츠의 '요람'을 순식간에 부수더니 결국 터질 게 터지고야 말았다. 원만한 해결이 요원해 보인다.

축구장 공사 현장을 뒤로 하고 줄지어 선 자동차 관련 상가와 인쇄업소를 지나 숭의로터리에 이르러 '독갑다리'로 향했다.



현재 기호일보와 한나라당 인천시당이 있는 정산빌딩 맞은편에 있는 '숭의공구상가'를 예전부터 '독갑다리'라고 부른 곳이다.

뭇 남성들 사이에서 독갑다리는 일명 '니나노' 집으로 통했던 곳이다. 1883년 개항과 함께 들어온 일본의 공창인 '유곽'이 신흥동 일대에 자리한 후 그렇게 된 듯하다.

그 일대가 니나노에 방석집, 기생 요릿집 등이 들어선 거대한 환락가였다고 했으니, 오죽했으면 지명까지 '꽃이 핀다'는 뜻의 '화개동'이었을까.

하지만 독갑다리의 원래 지명은 전혀 다른 배경과 의미를 지닌다.

독갑다리 친목회가 숭의공구상가 입구에 세운 독갑다리 유래비에는 '독갑다리'를 인천항이 개항한 1883년 세워진 다리로 설명한다. 마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독에다 흙을 채워 교각을 써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개항기 인천 중심가에서 서울로 가려면 이 지역을 거쳐야 했는데, 개천을 건너기 위해 이 다리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 개천이 뱀의 모양새를 닮았다고 해서 장사래마을이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중구 도원동이 옛 지명이다. 이 지명은 나중에 긴 개천이 지나는 마을이라는 뜻의 장천리로 바뀌게 되고, 다시 장천리, 여의리, 독각리 등 3개 동네로 나뉜다.

장천리와 독각리가 지금의 숭의동 일대이고, 두 마을의 일부를 떼어내 세운 도산리가 지금의 도원동이다.

일설에는 이 독갑다리를 도깨비가 나와 놀던 다리라고 해 '도깨비 다리'라고도 불렀다거나, '독값'을 받기 위해 건넌 다리라고 하여 그렇게 불렀다고도 한다.

도깨비다리는 현 숭의교회가 있던 곳이 도깨비산이라, 이를 부르던 '독각'이 '독갑'이 되었다는 설이다.

'독값'과 관련해서는 본디 바다와 마주했던 이 지역에서 해상거래가 편리해 이곳 다리를 중심으로 옹기장이 있었는데 서 유래한다는 설이다.

이 독갑다리는 1916년까지 사용했다고 한다.

지역 출신들은 다리를 놓았던 개천이 1960년대 초까지 있었다고 말한다. 공설운동장 옆으로 개천이 흘렀는데, 1964년 전국체전이 열려 복개됐다.

독갑다리 유래비

독갑다리 유래비가 서 있는 곳에는 공구상가가 밀집해 있다. 각종 기계 장비를 만드는 소규모 공장도 들어서 있다. 오래전 가좌동 매립지에 조성된 공구상가로 이전을 추진했으나, 가게는 떠나지 않고 그대로 남았다.

평일에는 상가를 드나드는 차량들로, 주말이면 실내경마장을 찾는 꾼들이 몰고 온 차량들로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숭의 공구상가에서 샛골로를 따라 도원역에 다다르니 '쇠뿔고개'의 지명 유래가 궁금하다. 우리의 지명 연구가 구전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터라 독갑다리도 다양한 해석이 따르는데, 주변 지형이 소의 뿔을 닮았다고 해 붙었다는 '쇠뿔고개'에는 또 다른 해석이 없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인천시에서 펴낸 '인천의 지명유래'나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 신태범 박사의 '인천한세기' 등등. 쇠뿔고개에 관한 지명유래는 한결같이 '소의 뿔'에 근거한다.

인천시립박물관 배성수 학예사는 "개항기 이전 조선시대까지 어느 기록에도 '우각'(牛角)이란 지명을 뜻하는 표기는 없다"고 말한다.

덧붙여 기록보다는 구전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일본인이 경인철도 부설 당시 역명(驛名)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조선인이 말하는 '쇠뿔고개'를 발음대로 듣고 '우각'으로 옮겨 적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그렇다면 당시 조선인이 지금처럼 '쇠뿔고개'라고 발음했을까. 오히려 한자로 표기된 '우각현'을 한글로 재해석하다 보니 '쇠뿔고개'라 한 건 아닐까.


정산빌딩에서 바라본 숭의동. 중구와 경계를 나눈 축구전용경기장 공사가 한창이다.
뒤로 붉은색 지붕의 전도관 건물이 선명하다.

지역의 원로 언론인이자 향토사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김양수 선생은 도원역 주변 지명과 마을 유래에서 '쇠뿔'의 의미를 재해석했다.

그가 말하는 '쇠뿔'은 쇠를 다루는 불이란 뜻의 '쇠불'을 강하게 발음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를 금창동(金昌洞)에서 찾는다.

금창동은 금곡동(金谷洞)과 창영동(昌榮洞)이 1995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합친 것이다.

창영동은 일제강점기 인천부 부내면에 속한 우각동이었다. 쇠뿔고개 유래에 따른 것이다.

금곡동은 인천부 부내면 지역으로 '쇠골' 또는 '금곡'이라 했고, 1914년 '금곡리'로 인천부에 편입됐다가 1946년 1월1일 금곡동으로 됐다.

쇠골은 '쇠가 나는 곳'이라 해서 붙은 것인데,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금곡'이다.

"옛날 최남선 선생께 사사한 박국성이란 향토사가 말씀이 인천부를 돌며 노인들을 만나고 조사한 바로는 '쇠를 다루는 불'이란 뜻을 담은 '쇠불고개'가 맞다고 했다"는 게 김양수 선생의 말이다.

당시 현 도원역 주변에 쇠가 났고 그 쇠를 다루는 대장간이 있었던 것을 고려해 '쇠불'이 맞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산이 세 개가 있어 '쇠불'이라 한 주민들 말도 있었지만 지형상 이는 맞지 않았다고 보았단다.

실제로 이 지역 주민들 기억 속에는 마을에 대장간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현재도 도원역에서 동인천역으로 향하는 참외전로 주변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김양수 선생은 송림3동의 옛 지명인 '샛골'도 '쇠골'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는데, '쇠불고개'란 게 "학문적으로 입증할 자료가 없어 확실히 내세우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덧붙여 "쇠뿔고개 지형이 소의 뿔을 닮았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지 이상하다"고도 했다.

또 다른 지명 표기 과정의 오류로, '샛별'을 뜻하는 계양구 효성동(曉星洞)을 들었다.

김양수 선생은 본디 억새풀이 많은 초원이란 뜻의 '새벌'이 '샛벌'이 됐다가 '샛별'로 바뀌었고, 이를 한자로 잘못 표기했다고 지적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김진영 2015-06-06 05:38:31
완전좋아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