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전하는 세밀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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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전하는 세밀한 지도
  • 엄동훈
  • 승인 2020.03.19 15: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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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나의 시마을]
봄편지 - 엄동훈

 

봄편지

                     엄동훈

 

오시던 길로 오시면

눈 덮인 산도 있고

바람 부는 들녘도 있을 거에요

개울 건너에

폭풍에 꺾인 포도나무를 쓰다듬는

지난 계절이 앉아있고

밭둑엔

잠이 든 들꽃들이 피어낸

갈대가 꿈처럼 스치고 있을 거예요

딱히 오신다는

소식을 주지 않아도

섭섭하다 아니 할 것이오니

오시거든 부디 깨워 주세요

 

❋ 요즘 ‘코로나 19’로 인해 사람들의 걱정이 많다. 신종바이러스는 백신이 없는 까닭에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는데 퍼져나가는 전염 병 앞에서 속수무책 당할 수 없는 사람들은 ‘마스크 쓰기’와 ‘손 씻기’, ‘사회적 거리두기’ 운동을 하면서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런 와중에 별의 별 일이 다 생겨났다. 각종 행사가 취소되고 마스크 사재기가 성행하고 가짜 뉴스가 범람했다. 바이러스를 잡는 일에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역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이러스만큼 삭막한 인심이 떠돌았다. 이런 행태를 보면서 성악설을 믿는다는 친구들도 늘어났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일면적이지 않다. 눈살을 찡그리게 했던 사태들이 잠잠해지고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은 코로나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기부 행렬이 이어지고 세입자들의 임대료를 인하해 주는 건물주도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바이러스가 심한 지역으로 자진해서 의료 봉사를 하러 떠나는 의사들이 있으니, 이들이라고 바이러스가 무섭지 않을까마는 이들의 의로운 행위에서 우리는 따듯한 인간애를 느낀다. 연일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 상황을 점검하고 안전 관리를 당부하는 방역 대책 위원들의 얼굴은 날로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굳건하게 제 할 일을 한다. 재빠른 방역 태세를 갖추고 대비를 하는 모습은 다른 나라의 모범이 되고 있으니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백신이 만들어지는 동안 연일 새롭게 발생하여 전염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있다면 이에 맞서는 인간의 휴머니즘이 있다.

바이러스의 공포에 시달리는 세상을 응원하듯 시인은 편지 형식으로 시를 써내려 간다. 문자와 이메일, 팩스 같은 정보 통신망이 발달한 시대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편지를 쓰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진화의 속성을 간직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성향에 비추어 볼 때 편지는 확실히 전시대의 유물이 되어가는 듯하다. 하지만 빠른 속도의 시대에도 ‘편지’와 ‘시’는 결코 구시대적 유물이 될 수 없다. 빨라서 오히려 정신적인 여유와 윤기가 없는 디지털의 방식과 나란하게 마음을 편하게 갖게 하는 이 아날로그 방식들은 아직도 유효한 편이라 할 것이다.

과거 남녀 사이에 서로 그리워하는 정을 써서 전달하기도 했던 편지는 바이러스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있는 이 삭막한 시기에 봄소식을 전달하는 반가운 사랑의 매체로 돌아왔다. “딱히 오신다는 소식을 주지 않아도” “오시거든 부디 깨워” 달라는 부드러운 어조는 침략자 바이러스를 보내고 싱그러운 봄을 맞이하고픈 화자의 최고의 주문처럼 보인다.

이곳으로 와 달라고 청하면서 오는 길을 세밀하게 안내하는 봄 편지는 “눈 덮인 산”, “바람 부는 들녘” “폭풍에 꺾인 포도나무”를 그리면서 이것들을 다 건너오면 “밭둑에 잠이 든 들꽃들”이 있다고 전한다. 시적 화자는 이 들꽃들을 모두 깨워 달라는 부탁의 말을 하고 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들꽃 같은 이 세상을 깨워주고 이 세상에서 힘들었던 산과 나무와 들녘을 깨워 달라는 당부의 말을 전하고 있다. 여성의 어조로 나긋나긋 전하는 이 ‘봄시’를 받을 이는 누구일까. 봄기운이 역력한 것을 보면 그는 아주 가까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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