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고속도로와 제2경인고속도로 입구 중간쯤에 낙섬사거리가 있다. 고속도로 2개와 인천항, 송도국제도시를 이어주는 교통요충지라 늘 붐비는 곳이다.
이 사거리 인근에 눈에는 잘 띄지 않지만 표지석 2개가 설치돼 있다. 제자리가 본디 바다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인데, 하나는 '낙섬-원도사지' 표지석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인천상륙작전 상륙지점 중 하나인 '청색해안'을 알리는 것이다.
사거리에서 서서 아무리 빙 둘러봐도 당최 지금은 서 있는 자리가 '바다'였음을 알길 없지만, 낙섬사거리는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낚시도 하고 수영도 즐기는 해안가였다. 그보다 훨씬 이전에는 나라의 평안을 빌며 제사를 모시던 섬이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근대기 이후 인천의 역사는 '간척'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물론, 바다를 육지로 만드는 간척사업은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피신했던 고려시대부터 있었다. 하지만 인천 내륙에서 땅을 넓히는 일이 시작된 때는 개항기부터라 하겠다.
인천이 외세에 밀려 개항하던 때, 외국인들이 살던 조계지가 좁아지자 시작된 간척사업은 해방 이후에도 꾸준히 계속돼 오늘에 이른다.
인천에서 간척사업이 가속화한 시기는 1980년대 이후로, 전체 간척 면적의 절반 가까이가 이 시기 사라졌다. 김포·송도·남동 갯벌은 이제 역사책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단어가 됐다. 아직 송도국제도시 조성 사업이 끝나지 않아 갯벌 매립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1910년 이전까지 간척사업은 주로 '주거용지'를 조성하기 위해서 진행됐다. 그러던 것이 한일병합으로 일본인들의 거주지 제한이 없어지자 갯벌은 항만용지나 공업용지, 상업용지로 쓰기 위한 땅이 돼 버렸다.
그 대상지가 지금의 만석동이나 화수동, 송림동 등지였다. 바다였던 그 땅은 현대체철과 동국제강, 두산인프라코어가 있는 중공업지대로 됐다. 1930년대 이후다.
용현동 627-92번지 한 음식점 화단에 낙섬터 표지석이 서 있다.
낙섬터 표지석이 이 일대가 예전에는 바다였음을 짐작케 한다.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서 '낙섬'(落島)이라고 불렀던 자그마한 섬이 아예 육지가 돼 버린 것도 이 시기다.
그나마 당시에는 낙섬은 육지와 붙었지만 바다를 바로 접해 섬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바로 옆 '소원도'는 그대로 섬이었다.
이 낙섬의 흔적은 1878년경 제작된 '화도진도'(花島鎭圖)에서 발견된다. 이 지도에는 '신도'(申島)라고 표기돼 있다.
낙섬의 본디 이름은 '원도'(猿島)라고 하는데, 조선시대 왕조의 안위와 백성의 평안을 위해 서해 바다 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원도사(猿島祠, 또는 원도신단)가 이 섬에 있었다고 한다.
낙섬에서 지낸 제의는 봄가을에 있었는데, 지역단위 제사가 아닌 임금을 대신해 인천의 수령이 직접 제사를 주재한 '국제'(國際)였다. 가뭄이 들어 백성이 곤궁해지면 기우제도 낙섬에서 진행됐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주변 여러 섬에 있어야 할 신단이 이 '낙섬'에 모두 모셔져 있었다는 점이다.
낙섬에 진행된 제사가 언제 시작돼 언제 폐지됐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역사학계는 세종·중종 때 등 각종 기록을 살펴 조선초기부터 있어왔던 것으로 추정한다.
정부 지원으로 아케이트공사가 한창인 토지금고 시장
19세기 전반 사정을 보여주는 '대동지지'(大東地志)에도 원도신단에 대해 밝히고 있어 이 시기까지는 제사를 지냈던 것으로 보고 있다. 하나 1841년 이후 간행된 모든 읍지에는 원도신단 제사가 폐지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도 그 시점은 명확하지 않다.
더군다나 신단의 형태나 제사 과정에 대해 전승돼 온 것이 없어 이 또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려던 이윤생 장군이 전사한 곳도 바로 '낙섬'이다.
낙섬(원도)에 대한 기록은 1917년 제작된 지도에 표기된 게 마지막이다.
국가의 제사가, 그것도 인천 연안에 있는 여러 섬의 제사를 함께 모시던 원도신단은 간척과 함께 그 흔적을 아예 찾을 수 없게 됐다. 지금 그 자리에는 '옥류관'이라는 음식점이 서 있고, 화단에 '낙섬-원도사지' 표지석이 옛 이야기를 전할 뿐이다.
1930년 매립된 낙섬 일대는 염전이었고 바다를 접하고 있어, 염전으로 가는 뚝방길을 따라 염전저수지나 바다로 나가 인천 사람들은 낚시와 수영을 즐겼다. 아직 섬이었던 소원도에서 캠핑을 하던 시기도 있었다.
적어도 지금 40대 중반이 초등학교에 다닐 적만 해도 그랬다.
옹진군청에서 바라본 제2경인고속도로 전경.
고속도로와 어깨를 마주할 정도로 폐석회가 높고 넓게 쌓여 있다.
1960년대 공업화 정책에 따라 서부산업단지와 주안수출단지 등 지역 곳곳에 산업단지가 조성되는데, 이때 용현동의 해안지역이 매립됐다.
현재 개발이 예정된 용현·학익지구이다. 제1경인고속도로 끝부분에서 인하대 앞 도로를 따라 '독배'라 불리던 옥련동 송도 돌산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다.
당시에는 국가가 아닌 개인이 매립을 주도했는데, 동양화학(현 OCI)이 이 일대를 매립했다. 규모만 80만평에 이르는, 개인이 주도한 매립 면적 중 가장 넓은 규모였다.
이곳에 동양화학이 1968년 비누와 유리 원료인 소다회(탄산나트륨) 공장을 가동했고, 이 공장에서 나온 폐수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생긴 폐석회가 쌓이면서 서서히 간척이 시작됐다.
모르는 이는 마을의 작은 동산 정도로 여길 정도로 높게 쌓인 이 폐석회의 처리 문제를 두고 얼마 전까지 지역에서 큰 논란이 있었다.
제2경인고속도로와 인천대교를 잇는 도로 공사 때도 불법으로 매립된 폐석회가 발견돼 문제가 되기도 했다. 현재 공사가 한창인 수인선 공사도 폐석회가 걸림돌로 작용하곤 했다.
폐석회는 옷을 더 깨끗하게 빨 때 쓰는 '표백제'의 원료를 만드는, 독성이 강한 폐수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나온 산업폐기물이다. 좀 더 깨끗해지려는 욕망이 오히려 환경을 더럽히는 아이러니한 결과물이라 하겠다.
특혜 논란 끝에 지금은 학익동 송암미술관 앞 유수지를 매립하는 데 이 폐석회를 쓰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용현학익지구 중 옛 SK정유와 대우일렉트로닉스 공장 부지.
SK정유터는 잡초만 무성하고 공장은 가동을 멈췄다. 개발이 진행되면 아파트가 들어선다.
이 매립지에는 동양화학 이외에도 정유소가 있었고, 대우일렉트로닉스 전신인 대우전자 등이 있던 공업지대였다.
정유소가 있던 부지는 없어진, 경기도 부천시를 연고로 한 프로축구단 합숙소가 몇 년 전까지 있었다. 지금은 허허벌판에 잡초만이 무성하다.
광주로 공장을 옮기기로 결정한 대우일렉트로닉스 용현동 공장이 폐쇄되기 직전인 2009년 12월15일 큰 불이 났다. 창고에서 난 불로 냉장고만 5천대가 불에 타 40억 원 가까운 재산 피해가 났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지만 소방관 5명이 다쳤다.
그리고 대우일렉트로닉스 용현동 공장이 가동을 멈췄다. 공장이 인천을 떠나자 900명에 달하는 노동자 중 상당수가 '광주행'을 포기해 실업자 신세로 전락했다. 436개 협력업체도 사업에 큰 타격을 받았다.
용정근린공원에서 바라본 용현5동. 갯벌과 염전이었던 이 곳에
1978년 택지가 조성돼 아파트와 빌라, 단독주택이 들어서 있다.
1975년 4월1일 '토지금고'가 설립됐다. '토지금고'는 국가를 대신해 토지를 취득·관리·개발하고 공급하는 일을 하는 공기업으로 '한국토지공사'의 전신이다. 한국토지공사는 2009년 10월1일 대한주택공사와 통합해 한국토지주택공사로 됐다.
인천에서 흔히 말하는 '토지금고'는 한국토지공사의 전신을 뜻하지 않는다. 용현5동의 또 다른 지명이다. 오히려 용현5동보다는 '토지금고'가 더 익숙하다.
용현5동은 1978년 3월말 택지 조성을 끝내고 사람이 살기 전까지 대부분 1930년대 조성된 염전지대였다.
이 지역을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터를 닦은 곳이 바로 '토지금고'이다. 이를 계기로 용형5동을 '토지금고'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토지금고'가 1976년 5월 용현동 갯벌과 염전지대를 매입, 인천시 도시계획에 따라 1977년 6월 이 지역에 시범주택단지를 들이려고 택지 조성 공사를 시작했다.
도로와 주택단지 등 총 면적만 10만여 평에 달한다. 서민주택단지 3만3천 평, 상업지역 2만9천 평 등을 조성했다.
1930년대 염전에서 출발, 1960년대 공업단지를 거쳐 1970년대 토지금고까지. 인천의 역사가 그러하듯, 용현5동의 역사도 매립(간척)과 함께 시작해 지금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