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호흡이 필요한 시점이다. 2015년 메르스는 한 번의 피크를 찍고 사그라들었지만, 코로나 상황은 그때와 사뭇 다르다. 두 번째 피크가 오히려 첫 번째 피크보다 더 높게 나온 것이다. 경각심이 높아짐과 함께, 생활은 언택트 기술의 언급과 활용으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포스트 코로나 시기라지만 어찌 모든 게 그렇겠는가. 기억의 잔상이 오히려 짙어지는 반작용도 있어 여러모로 기회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공적마스크를 이제 10매까지 구매 가능한 사실은 불안을 내쫓아 준다.
서구 가정동에는 오랫동안 낯선 이름으로의 공원이 하나 존재했었다. 바로 ‘콜롬비아 공원’이 그것인데, 2018년 여름에야 새 보금자리로 이사했다. 2호선 가정중앙시장역 위쪽에 자리한 공원에는 콜롬비아군 참전기념비가 1975년 9월 제막되었다. 지나가는 낯선 이는 ‘저게 뭐지?’라며 한 번쯤은 읊조리게 되는 데 아니나 다를까 콜롬비아 공원과 가정동이 무슨 내밀한 관계인가 싶기도 하다.
콜롬비아는 남미 국가 중 유일하게 유엔 참전군을 한국에 파견했다. 이후 5년여의 지상 작전에 투입되었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전쟁에 희생된 콜롬비아군의 넋을 기리고 추모하고자 1975년 참전 기념비가 인천 서구에 세워지게 되었고 매년 추모 행사가 치러졌다. 1987년에는 콜롬비아 대통령이 방한, 다녀가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은 어느덧 40년이 넘었고 아이들의 놀이터였을 공원, 사진에 단골로 등장했을 기념비는 가정동 루원시티 개발의 여파로 이전이 불가피했다. 이후 서구 연희동 경명공원 내 쾌적한 공간으로 이전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콜롬비아 공원은 가정동 일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라면 누구에게나 상징 아닌 상징이었을 공간일 것이다. 그랬던 기념비가 멀리는 아니지만, 연희동으로 옮겨 갔음에 아쉬움도 분명 있을 터이고 말이다. 하지만 주변 여건으로 보자면 상당히 위태로운 곳이다. 지하로는 지하철 진동이 있고 양옆으로는 자동차들이 쉴 새 없이 지나다녀 피로 위험이 높아질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기념비가 조금씩 부서져 나갈 때는(사실 내막을 모른 채) 안타까웠다. 카리브해 정기를 지닌 콜롬비아군의 위용이 새롭게 보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기념비가 새 장소로 옮겨진 후로는 더욱 평온한 자태로 두 국가의 관계를 잇고 있었다. 잘 정돈된 공원 주변으로 새로이 아이들도 보이고 산책 나온 사람들과 반려견 등의 출현은 기존 험한 곳에서 외롭고 위태롭게 견뎌내야만 했던 시절의 종지부를 찍은 것처럼 반가웠다. 최근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당시 참전용사 힐베르토 디아스 벨라스코 씨(87·사진)가 당시 일본에서 산 5달러짜리 코닥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한국에 공개한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눈이 없는 나라에서 온 사람답게 겨울 추위를 견디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고 하는데, 참전기념비가 새롭게 단장된 소식을 알면(이미 알고 있을 수도) 분명 뿌듯해할 것이다.
‘콜롬비아 공원’ 이름은 사라졌으나 기념비는 경명공원 안에 좀 더 화사한 자태로 남아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을 깊게 새기게 된다. 자세한 사항은 몰라도 콜롬비아가 인천(한국)과 가까운 사이라는 사실, 매우 좋다는 “아싸라비아!” 표현처럼 어려운 시기 함께 살아냄의 실례가 아닌가 싶다. 한편 7월부터는 도시공원 일몰제로 인해 코로나 못지않은 공원의 위기가 장마를 등에 업고 접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