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란 시인은 젊은 시인이다. 시를 읽는데 시인의 나이는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만 그래도 세상이 촌각을 다투며 변화하는 세상이어서 종종 시를 읽고 시인의 나이가 궁금해질 때가 있다. 이른바 세대 차이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박소란 시인은 프로필에 나이를 밝히지 않았으니 정확히는 모르고 짐작이나 해볼 따름이다. 나하고는 적어도 한 세대 차이는 날 것 같다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 나의 딸 세대라는 것이다.
금년 문예지 《시인수첩》 여름호에는 제2회 김종철 문학상이 발표되었다. 일이차 심사과정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경쟁을 벌인 시집이 이선영 시집 『60조각의 비가』와 박소란 시집 『한사람의 닫힌 문』이었다. 김종철 문학상엔 이선영 시집이 선정되었고 나는 두 시집 모두 구입해서 읽었다. 읽어가며 두 시집 모두 개성이 빛나는 좋은 시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쯤 시간이 지나 바로 박소란 시집 『한사람의 닫힌 문』이 노작홍사용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학상의 상금이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겠지만 여하튼 상금이 김종철 문학상의 3배에 달했으니 전화위복 혹은 새옹지마란 말이 어울릴 법도 하다. 좋은 시는 결국 인정받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종 시를 읽다가 시인의 프로필을 검색해보고 놀랄 때가 있다. 시와 시인의 모습이 너무 잘 어울리고 닮아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시는 곧 그 시인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박소란 시인도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일면식도 없는 내가 박 시인의 시집을 읽고 소감문을 쓰게 된 것은 시인의 시에 공감하고 감동을 받은 때문이고 그의 시가 보편적인 진실과 섬세한 감성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이
당신은 말이 없는 사람입니까
이어폰을 꽂은 채 줄곧 어슴푸레한 창밖을 내다보고 있군요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태운 7019번 버스는 이제 막 시립은평병원을 지났습니다 광화문에서부터 우리는 나란히 앉아 왔지요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눈을 준 이 저녁이 조금씩 조금씩 빛으로 물들어 간다고
건물마다 스민 그 빛을 덩달아 환해진 당신의 뒤통수를 나는 몰래 훔쳐봅니다
수줍음이 많은 사람입니까 당신은
오늘 낮에 혼자 밥을 먹었습니다 행복한 사람들이 가득한 광장을 혼자 걸었습니다
언젠가 당신은 그곳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난 적이 있지요 언제 밥이나 한번 먹자 악수를 나누고서 황급히 돌아선 적이 있지요
나는 슬퍼집니다
당신은 곧 벨을 누르고 그렇고 그런 약속처럼 버스는 또 멈출 테지요
나는 다만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변덕스러운 오늘의 날씨와 이 도시와 도시를 둘러싼 휘휘한 공기에 대해 당신 무릎 위 귀퉁이가 해진 서류 가방과 손끝에 묻은 검뿌연 볼펜 자국에 대해
당신은 이어폰을 재차 매만집니다
어떤 노래를 듣고 있습니까 당신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그 노래를 나도 좋아합니다
당신을 좋아합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문이 열립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당신이 유유히 문을 나섭니다 당신의 구부정한 등이 저녁의 미지 속으로 쓸려 갑니다
우리는 헤어집니다 단 한 번 만난 적도 없이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내 이름은 소란입니다
-박소란 <모르는 사이>전문
위 시는 우연히 7019번 시내버스에 나란히 앉았던 한 모르는 사이의 이성에 대한 느낌을 아주 소박하고 단순하게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다. 한 번 읽어서 얼른 의미가 들어오지 않으면 다시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시를 쓴 시인이 여성이니 옆에 앉은 사람은 남자일 것이다. 시인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나 하고 떠올린대도 그건 할 수 없다. 독자에겐 자연스러운 현상일 테니 말이다. 화자는 혼자 밥을 먹고 혼자 광장을 걸었다고 고백하듯 말한다. 옆에 앉은 사람에 대해 궁금한 것이 참 많은 것 같다. 이야기를 나누고도 싶어 한다. 상대방이 듣고 있는 음악도 궁금하고 이름도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말 한 마디 나눠보지 못한 채 상대방은 버스에서 내리고 두 사람은 헤어진다. 이 광활한 대도시에서 다시 모르는 사이가 된다. 화자는 내린 사람 뒤에 대고 혼자 마음속으로 자기 이름을 알려주기도 한다. 이 한 편의 무언극 같은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독자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세계적인 대도시 서울의 한 시내버스에서 일어난 이 판토마임 같은 상황은 단지 일 개인의 문제로만 볼 수 없는 보편성이 있다. 화자에게만 독특한 것이 아니라 대도시 시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시대적 상황이다. 서울이라는 대 도시의 한 단면이기도 하고 거대도시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대도시의 익명성 속에 가려서 우리가 얼마나 왜소해지는지 사랑의 미묘한 감정이 어떻게 소모되고 표출되는지 감지할 수 있다. 독자가 화자가 되어 그 미묘한 심리 변화를 따라가 보는 것만으로 훌륭하게 시 한 편 읽는 셈이 된다. 참 은근하고 소박한 우리들 일상의 한 단면이다. 화자가 꼭 시인일 필요는 없다. 갓 입학한 대학생이어도 좋고 새내기 회사원이어도 무방하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보편적 정서일 따름이다.
상추
퇴근길에 상추를 산다
야채를 먹어보려고
좀 건강해보려고
슈퍼에서 한봉지 천오백원
회원 가입을 하고 포인트를 적립한다
남들처럼 잘 살아보려고
어떤 이는 화분에 상추를 기른다는데
아 예뻐라 정성으로 물을 주면서
때가 되면 그것을 솎아 먹겠지
상추를 먹으면
단잠에 들 수 있다는데
상추가 피를 맑게 한다는데
나는 건강해질 것인가
상추로 인해
행복해질 것인가
밥을 데운다
냉장고에서 묵은 쌈장을 끄집어낸다
상추가 포장된 비닐을 사정없이 찢는다
찢은 비닐을 쓰레기통에 내동댕이치는 나는
행복해질 것인가
상추는 나를 사랑할 것인가
-박소란 <상추>전문
위 시 <상추>에도 화자의 일상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우선 화자는 대도시에 혼자 살고 있는 평범한 월급쟁이다. 퇴근길에 상추를 천오백원에 사고 냉장고에서 찬밥을 꺼내 데워 먹는 모습에서 일인가구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한 때 웰빙(wellbeing)이란 단어가 유행한 적이 있다. 건강, 여행, 취미, 음식 등 일상생활 속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요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시의 화자도 마찬가지다. 건강해지려고 상추를 사고 상추로 인해서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웨빙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생활 단면이 나타나 있다.
시는 익숙한 것을 거부한다. 익숙한 주제, 익숙한 제재, 익숙한 표현에서 끝없이 벗어나려고 한다.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한다. 보편적 질서에 편입시키면 시는 금세 진부해진다. 그렇다고 낯설게 한다고 바로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 속에 보편적인 사랑과 진실이 담겨 있어야 하고 독자들이 동의하는 공감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 새로운 표현, 새로운 발견이 있어야 하고 언어의 배열에서도 기성 작품과 차별성을 두어야 시로서 기능을 하게 된다.
내가 이렇게 소감문을 쓰는 것은 오래 시를 읽고 쓰고 사랑해온 것을 바탕으로 개인적인 소감을 독자와 나누고 싶을 뿐이다. 수없이 많은 시를 어떻게 모두 이해할 수 있겠는가. 수많은 시인의 제 각각의 체험과 제 각각의 성장 배경, 제 각각의 개성과 표현 방식을 어떻게 다 알겠는가.
나는 내 시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다. 많은 시인, 평론가들이 내 시집의 발문과 해설을 썼지만 내 의도를 정확히 짚고 작품을 설명하는 예를 아직 보지 못했다. 아주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내 독특한 체험과 아픈 고뇌를 꿰뚫어 보는 일엔 하나같이 간과하거나 소홀했다. 물론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다. 내가 쓰는 이 소감문도 시인의 의도를 정확하게 짚어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시를 읽고 쓰고 종종 신문지상에 소감문을 발표하곤 한다. 알면 아는 만큼 모르면 모르는 대로 쓴다. 시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고 때로는 반대의 방향으로 이해한 것일 수도 있다. 잘못 읽었다고 해도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시시비비를 따질 사안도 아니다. 시가 일단 시인을 떠나면 그때부터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빛의 주인
문틈으로 새어 나온 빛,
한 줄기 가느다란
복도를 지나다 보았다
문 앞에 잠시 멈춰 빛의 연한 몸뚱이를 쓸어 보았다
아주 어리고 아주 순한 빛이었다
그 빛의 주인을
나는 알지 못한다
한동안 곁을 어슬렁거리던
빛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와 마른 손등을 핥는가 싶더니
어느새 나를 피해 멀찍이 달아났다
어두운 복도를 종종종 걸어서
찬 허공을 사뿐사뿐 날아서
빛 쪽으로
빛 쪽으로
빛은 서서히 멀어져 갔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빛은
돌아보지 않았다
곧 문이 열릴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얼굴이 나를 불러 세워
빛의 행방을 추궁할 것이다
-박소란 <빛의 주인>전문
빛을 주제로 쓴 시다. 그 빛은 어떤 빛일까. 시의 행간을 살펴보았다. 신앙에서 일컫는 빛일까, 아닌 것 같았다. 그냥 물리적인 빛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시인이 말하고 있는 빛 속에 물리적인 빛만이 아니라 기독교에서 언급하는 빛의 의미가 숨어 있는 게 분명하다. 어떤 독자는 그 빛을 찾아내고 어떤 독자는 간과할 것이다.
나는 시를 여러 번 읽으며 행간에서 신앙의 빛을 발견했다. 빛은 어떤 경우에도 어둠과 대비되는 밝음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물리적인 빛이라 해도 신앙의 의미를 내포할 수밖에 없다. 예수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기를 좋아했다. 빛은 예수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사물이다. 어떤 경우에도 빛은 그 범주에 속하게 마련이다. 사악한 빛은 없겠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빛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있다. 한 시인이 <봄은 고양이로다>에서 봄을 고양이에 비유했듯이 이 시인은 빛을 연한 몸뚱이를 가진, 아주 어리고 순한 동물에 비유하고 있다. 빛이 어린 양이고 아주 어린 아기일 수도 있다.
빛이 빛 쪽으로 빛 쪽으로 서서히 멀어졌다는 묘사로 보아 그 빛은 땅거미가 내리고 서서히 사라지는 물리적인 빛을 말하는듯하나, 세상의 가장 어두운 얼굴이 나를 불러 세워 빛의 행방을 추궁할 것이라는 시행으로 보아 이 빛은 어둠과 대비되는 빛이고 그 빛은 우리가 찾는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빛이 된다. 빛은 보조관념이고 그리스도의 사상은 원관념인 셈이다.
박소란의 시 세 편을 함께 읽었다. 박소란은 젊은 시인이다. 한때 미래파라는 이름으로 도저히 접근조차 어려운 시가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지금도 그 부류의 시가 많다. 몇 번을 읽으며 의미를 파악해보려고 애를 써도 결국 실패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좀 어렵더러라도 몇 번 읽으면 선명하게 그 의미가 들어오는 시가 있다. 소통 불능의 시는 독자보다는 시인들의 책임이 크다.
해독 불능의 난해시가 반드시 좋은 시는 아닐 것이다. 난해한 만큼 시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도 아니다. 일반 독자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일부러 난해한 표현을 사용한 것일 수도 있다. 재주가 빈약하여 허세를 부린 것일 수도 있다. 시의 대중화를 위해서 평범한 독자들이 읽고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은 시인들의 몫이다. 독자들도 어려운 시 앞에 절망하지 말고 꾸준하게 시를 읽어 시에 대한 안목을 길러야 한다. 시인과 독자가 함께 좋은 시를 도모하는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