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청천동 일대/ 유광식 시각예술 작가
절기는 어느덧 추분을 지나 밤이 길어지는 시간이 되었다. 코로나19의 시간도 더불어 길어졌음은 말할 나위 없다. 모기가 마지막 저공비행을 하다 잡히고 미국의 대통령은 코로나19에 발목이 잡혔다. 이번 추석엔 가족격리 차원에서 모이지 않았는데, 하반기로 꾸깃꾸깃 접힌 잔일이 많아 바쁘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세상 모두가 서로의 건강을 위해 떨어져 지내야 하는 현실은 지금 생각해봐도 화들짝 놀랄 일이며 세계사에 기록될만하다. 긴 터널을 통과하는 것처럼 매우 어렵지만 인정하고 인내해야 한다.
부평구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청천(淸川)동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마을로 지칭된다. 이전 세대분들은 골짜기에서 물고기와 가재를 잡던 추억을 지닌 분이 많을 텐데 지금의 세대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는 이야기로 서로가 당혹스러울 따름이다. 청천동은 동쪽에는 국가산업단지와 한국GM 부평공장이, 서쪽에는 장수산이 위치하여 지명의 의미와는 다르게 공업지대이다. 면적의 1/2 이상이 공장지대로, 동네를 걷다 보면 옛날 기계와 함께 바삐 돌아가던 시절을 추측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은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한 세대는 30년 정도의 주기로 바뀐다. 우리는 지난 세대와의 다름을 발견하고 서로 구분 짓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중 하나가 재개발, 재건축 바람이다. 이곳 역시 장수산 아래로 한 무더기의 공간이 시대의 부름에 쓸려 사라졌고 새 모습을 갖추는 중이다. 장수산 아래 복잡다단했던 삶의 이엉이 풀리고 반듯한 새 건물이 지어지고 있다. 장수산 한쪽에는 인천나비공원이 자리한다. 그 옆으로는 청천농장이 있는데 옛 양계마을의 흔적이다. 양계마을은 ‘농장’으로 불리며 ‘공단’으로 용도변경 되었다. 이젠 나비가 ‘훨훨’ 날거나 ‘꼬끼오~’하고 우는 닭 소리는 이 동네에서 조금 벅찬 감이 되었고, 동서로 뻗은 경인고속도로의 자동차 굉음과 작은 영세공장에서 나는 기계음 소리가 달라진 시냇물 소리 ‘청천’을 대신한다.
원적산과 천마산 줄기에서 이어진 맑은 물이 굴포천으로 흐르던 모습은 꿈으로 남아야 할까? 물길 하나만 만들어도 우리는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는데 새로 구획되는 도시의 모습에서 물길은 사치의 대상이 되어버렸으니 안타깝다. 산 아래 좁고도 기다란 골목을 따라 걷노라면 낯선 어르신을 만나고 빨래도 만나고 험상궂은 인상의 아저씨도 만나고 후다닥 뛰어가는 아이도 만난다. 감나무 가지가 어깨를 건드리고 대추가 시선을 잡아끈다. 움직이는 CCTV 고양이의 발걸음과 봉화보다 빠른 강아지 소리에 온 동네는 한통속이 된다. 바람이 등을 떠미는 가벼운 걸음에 많은 장면을 머리에 담는다.
주소 명이 이젠 도로명으로 바뀌었지만, 땅의 이름을 지어 만든 이전 체계를 잃어버린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둘 다 의미가 있어 보이지만, 우리에겐 공간의 점을 먼저 상기한 후 길을 찾아가는 의식이 강하지 않나 생각이 들어서다. 도로를 생각하면 어느 길과 어떤 분기점에서 얼마나 많은 집이 있는지 그 형체가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청천동을 생각할 적에도 그렇다. 길을 가다 만나는 청천동이라기보다 청천동으로 가는 길이라는 의식에 반가움이 있다.
경인고속도로의 담벼락 아래에서 커 온 청천동. 먼 훗날 경인고속도로 지하화에 따른 생활권 확장이 예상된다. 맑은 시냇물까지는 아니어도 마을 공동체 문화가 공장의 기계음 소리 못지않게 졸졸 흘렀으면 하는 바람이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소상공인의 고충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생활의 존엄이 뿌리 뽑히지 않아야 할 것이다. 요새 만날 순 없어도 마음은 가까이란 말을 자주 한다. 우리 사회는 태풍도 잘 견뎠고 생활방역도 잘하고 있으니 더 나은 내일과 미래가 선물처럼 올 것이다. 바야흐로 2020년 4/4분기의 시작이고 막판 스퍼트를 낼 시기다. 깊어진 밤에 우리의 생활과 계획을 돌아보며 힘내어 본다. 이는 청천동 장수산 중턱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자세와 다를 게 없다. 다시 맑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