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이방인-㉝ 증언자들의 무기력
〔인천in〕이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서유당’과 함께 어렵게만 느껴지던 동·서양의 고전 읽기에 도전합니다. ‘서유당’의 고전읽기모임인 ‘하이델베르크모임’은 Jacob 김선(춤추는 철학자), 김현(사회복지사), 최윤지(도서편집자), 서정혜(의류디자이너), 소순길(목사), 이광남(칼럼니스트)’ 등이 원서와 함께 번역본을 읽어 내려가며 삶의 경험을 나누고 있습니다.
두 번째 고전읽기- 알베르 카뮈(김화영 역), 이방인 L’Etranger, 민음사.
글: Jacob 김 선
Mais le président a déclaré qu’on ne lui demandait pas des appréciations, mais des faits.
재판장은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판단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말했다.
마리가 들어왔다.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여전히 아름다웠다. 뫼르소는 이 순간에도 본능에 충실하다. 머리를 풀어 헤쳐 놓았을 때가 더 좋았다고 생각했다. 뫼르소가 앉아 있는 곳에서도 그녀의 볼록한 젖가슴의 무게를 엿볼 수 있었고 아랫입술이 여전히 조금 부푼 듯한 것도 알아볼 수 있었다. 뫼르소에게 마리는 뫼르소를 뫼르소답게 하는 증인일 뿐이다. 그와 달리 그녀는 매우 안절부절하는 것 같았다. 곧 그녀는 언제부터 뫼르소를 알았느냐고 하는 질문을 받고 전에 다녔던 회사에서 뫼르소와 같이 일하던 시기를 말했다. 형식적인 질문으로 시작해서 본질적인 질문으로 나아갈 것이다. 즉 재판장은 뫼르소와의 사이가 어떤 것인가를 알고 싶어 했다. 그의 질문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신의 친구라고 마리는 말했다. 집요한 또 다른 질문에 대해 뫼르소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대답했다. 재판장이 멍석을 깔았으니 이제는 검사가 재주를 부릴 시간이다.
서류를 뒤적이고 있던 검사가 갑자기 언제부터 둘의 관계가 시작되었느냐고 물었다. 마리는 그 날짜를 말했다. 시간의 확정이 얼마나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지 마리는 모르고 있다. 검사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것은 엄마의 장례식이 있은 다음 날인 것 같다고 지적했다. 검사는 뫼르소를 규정할 연결고리를 찾았다. 약간 비웃는 말투로 그러한 미묘한 사정을 더 캐묻고 싶지도 않고 또 마리의 입장을 모르는 바 아니나 자기의 의무상 부득이 예의를 벗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예의에 어긋난 것에 용서를 구하는 듯 하면서 본인의 의도를 자연스럽게 관철시킨다. 검사는 마리에게 뫼르소와 관계를 맺게 된 그날 하루 동안의 일을 요약해 말해 달라고 요구했다. 마리는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으면 대충 얘기해도 될 텐데 검사의 강권에 못 이겨 해수욕을 갔던 일, 영화 구경을 갔던 일, 그리고 둘이서 뫼르소의 집으로 돌아온 일을 말했다. 마리의 대답은 마리를 답답하게 할 답변으로 되돌아 올 것이다.
검사는 집요하고 철저하다. 차석 검사는 예심에서 마리의 진술을 듣고 그날 영화의 프로그램을 조사해 보았다고 말한 다음 그때 무슨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는지를 마리 자신의 입으로 말해 주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계속 답해야만 하는 굴레에 갇혀버린 마리는 거의 질린 목소리로 그것은 페르낭델이 나오는 영화였다고 말했다. 비극적인 상황에 희극적인 사건의 중첩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경악스러움을 자아낼 지도 모른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이 잠잠해졌다. 이 순간을 놓칠 리 없는 검사는 일어서서 심각하게 그런데 참으로 감동한 듯한 목소리로 뫼르소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어머니가 사망한 다음 날에 해수욕을 하고 난잡한 관계를 맺고 희극영화를 보러 가서 시시덕거렸다고 천천히 또박또박 끊어 말했다. 본인의 의도대로 시나리오가 완성된 느낌이다. 여전한 침묵 가운데 검사는 말을 맺고 자리에 앉았다. 갑자기 마리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이성적인 답변들이 그녀를 감성적인 호소를 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그게 아니다, 다른 것도 있었다, 사람들이 억지로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말을 하게 만든 것이다, 자기는 뫼르소를 잘 알고 있고 뫼르소는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마리는 진짜 하고 싶은 얘기들을 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검사에게 타이밍을 뺏긴 것이 문제다. 재판장이 손짓을 하자 서기가 그녀를 데리고 나갔고 심문은 다시 계속되었다. 마리는 답답함이 가득한 퇴장을 하고 있다.
이제 증언의 흐름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다음에 마송이 나서서 뫼르소는 얌전한 사람이며 성실한 사람이라고 말했으나 거의 아무도 들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살라마노도 뫼르소가 그의 개의 일로 퍽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는 점을 상기시켰으나 역시 들어 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해해 주셔야 한다고 거듭 말했으나 이해해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도 끌려 나갔다. 법정의 분위기는 결정된 듯하다.
뒤이어 레몽의 차례가 되었다. 그가 마지막 증인이었다. 뒤집을 만한 증언이 나오길 기대한다. 레몽은 뫼르소에게 슬쩍 손짓을 해 보이고 다짜고짜로 뫼르소는 죄가 없다고 말했다. 출발이 레몽답게 어설프다. 재판장은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판단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말했다.
위 그림은 파이프다. 그런데 그림 아래에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글이 쓰여 있다. 그림에 대해 판단하기 쉽지 않다. 칸트는 <판단력비판>이라는 책에서 ‘판단력’이란 특수한 것을 보편적인 것 아래에 함유되어 있는 것으로 사고하는 능력이라고 어렵게 정의하고 있는데 레몽의 판단력에 적용해 보면 ‘죄가 없음’이라는 개념을 가능케 할 사실들을 나열할 상상력이 필요하다. 개념을 뒷받침할 사실의 제시도 빈약하고 미리 전제된 개념과 사실들을 연결할 상상력도 부재한 상황이다.
레몽의 판단이 사실에 근거한 판단임을 말할 재주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그런 재주가 없으니 재판장은 그에게 기다렸다가 질문을 듣고 대답을 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와 피해자와는 어떤 관계였는지 정확하게 말해 보라는 요구가 있었다. 레몽은 그 기회를 타서 자기가 피해자의 누이의 뺨을 때린 다음부터 피해자가 미워하고 있던 것은 바로 자기라고 말했다. 자신에게 방향을 돌리려고 애쓰는 답변이다. 그러나 재판장은 피해자가 뫼르소를 미워할 이유는 없었느냐고 물었다. 그 질문에 궁리했을 레몽은 뫼르소가 바닷가에 같이 있었던 것은 우연의 결과였다고 말했다.
우연이라고 우연히 답한 레몽의 헛점을 검사는 우연하게 지나치지 않는다. 검사는 어째서 사건의 발단이 된 그 편지가 뫼르소의 손으로 쓰였느냐고 물었다. 레몽은 그것도 우연이었다고 대답했다. 그에게 답변의 논리는 우연뿐인가 보다. 검사는 이 사건에 있어서 우연은 이미 양심에 많은 폐해를 가져왔다고 반박했다. 그는 레몽이 그의 정부의 뺨을 때렸을 때 뫼르소가 말리지 않은 것도 우연인지 뫼르소가 경찰서에 가서 증인이 되었던 것도 우연인지 그때 그 증언 내용이 두둔하는 쪽 일색이었던 것도 우연인지 알고 싶다고 했다. 우연이 연속적으로 중요한 사건의 논거로 제시될 수 없음을 필연적으로 우리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