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이방인-㉞검사와 변호사의 논리
〔인천in〕이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서유당’과 함께 어렵게만 느껴지던 동·서양의 고전 읽기에 도전합니다. ‘서유당’의 고전읽기모임인 ‘하이델베르크모임’은 Jacob 김선(춤추는 철학자), 김현(사회복지사), 최윤지(도서편집자), 서정혜(의류디자이너), 소순길(목사), 이광남(명상활동가)’ 등이 원서와 함께 번역본을 읽어 내려가며 삶의 경험을 나누고 있습니다.
두 번째 고전읽기- 알베르 카뮈(김화영 역), 이방인 L’Etranger, 민음사.
글: Jacob 김 선
“et enterré sa mère dans le cœur du criminel. C'est pour ça que j'affirme sa culpabilité.”
“범죄자의 마음으로 자기의 어머니를 매장했으므로 나는 이 사람의 유죄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검사는 레몽에게 생계수단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창고업이라고 레몽이 대답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검사는 배심원들에게 레몽의 친구 뫼르소는 그의 공범자요 친구이며, 가장 야비한 종류의 음란범죄 사건이고, 피고가 도덕적으로 파렴치한이라는 사실 탓에 더욱 흉악하다는 것이었다. 검사는 배심원들을 설득하는 서술적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레몽이 변명을 하려 했고 뫼르소의 변호사도 항의를 했으나 재판장은 검사가 이야기를 끝마치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의 여유를 보이는 검사는 자신이 덧붙일 것은 그리 많지 않다고 말한 다음 레몽에게 피고가 친구냐고 물었다. 레몽은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자 검사는 뫼르소에게 같은 질문을 했고 뫼르소는 레몽을 바라다 보았다. 친구로 연결된 두 사람은 한 패거리로 규정된 것이다. 그런데 레몽은 뫼르소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검사는 배심원들에게 돌아서며 말했다.
어머니가 사망한 다음 날 수치스러운 정사에 골몰했던 바로 그 사람이 하찮은 이유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치정사건을 정리하려고 살인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의 죽음과 치정사건은 강력한 인과 관계를 갖게 되는 순간이다. 흄의 인과율에 따르면 검사의 논리는 자신의 경험이 만든 것이라 볼 수 있다.
검사는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자신의 논리를 충분히 이해시킨 만족감이 뭍어난다. 뫼르소의 변호사는 참다못해 두 팔을 쳐들어 올리며 외쳤다. 흥분한 상태라 자신의 상태는 잊은 것 같다. 그 때문에 소매가 다시 흘러내리면서 풀 먹인 셔츠의 주름이 드러나 보였다. 도대체 피고는 어머니를 매장한 것으로 기소된 것인지 아니면 살인을 한 것으로 기소된 것인지 묻자 방청객들이 웃었다. 정말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다. 어머니의 죽음과 살인사건을 엮어 가는 검사의 논리의 모순을 간파한 예리한 질문이었던 것이다.
검사가 다시 벌떡 일어나 법복을 바로잡고 나더니 존경하는 변호인처럼 순진하다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 두 범주의 사실 사이에 어떤 근본적이며 비장하고 본질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자신이 편 논리에는 모순이 없음을 명백하고도 단호하게 다시 한번 주장하고 있다.
범죄자의 마음으로 자기의 어머니를 매장했으므로 뫼르소의 유죄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검사는 말했다. 어머니의 매장이 먼저 일어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범죄사건의 심리적 이유가 이미 어머니의 장례과정에 나타나고 있다고 검사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 장례에 대한 증인들의 증언을 집중적으로 캐들어 갔던 것이다. 이 논고는 방청객들에게 엄청나게 강한 인상을 준 것 같았다. 변호사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변호사마저 동요된 빛이었고 뫼르소는 사태가 자신에게 결단코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법정은 폐정되었다. 법원에서 나와 차를 타러 가면서 뫼르소는 매우 짧은 한순간 여름 저녁의 냄새와 빛을 느꼈다. 본래의 감각이 회복되는 시간인 것이다. 어두컴컴한 호송차 속에서 뫼르소는 본인이 좋아하던 도시, 그리고 이따금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던 어떤 시각의 귀에 익은 그 모든 소리들을 마치 자신의 피로한 마음속으로부터 찾아내듯이 하나씩 다시 들을 수 있었다. 법정에서의 답답했던 소리에서 해방된 순간이다.
이미 고즈넉하게 가라앉은 대기 속에서 들려오는 신문팔이들의 외치는 소리, 작은 공원 안의 마지막 새소리, 샌드위치 장수의 부르짖음, 시내 고지대의 급커브 길에서 울리는 전차의 마찰음, 그리고 항구 위로 밤이 기울기 전 하늘에서 반향 되는 어렴풋한 소리, 그러한 모든 것이 뫼르소에게는 소경이 더듬어 가는 행로와도 같은 것이 되어 주었다. 소경의 마음처럼 막막한 심경 너머로 들리는 소리가 그에게는 평안의 소리로 다가왔을 것 같다.
그것은 형무소로 들어오기 전에 자신이 익히 잘 알고 있던 그 행로였다. 그것은 이미 오랜 옛날 자신이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던 그런 시각이었다.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의 결말도 뫼르소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때면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언제나 가볍고 꿈도 없는 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인가 달라져 버린 것이 있었다. 왜냐하면 내일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이제 자신이 다시 대면한 것은 바로 자신의 감방이니까 말이다. 감방에서의 잠을 자고 나면 마치 여름 하늘 속에 그려진 낯익은 길들이 죄 없는 수면으로 인도해 갈 수도 있고 감옥으로 인도해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은 뫼르소에게 어떤 의미인가?
피고석에 앉아서일지라도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는 것은 언제나 흥미 있는 일이다. 그 이야기의 흐름이 이야기의 결말을 결정짓기 때문에 흥미로울 수 밖에 없다. 검사와 변호사 사이에 변론이 오가는 동안 사람들은 뫼르소의 이야기를 많이 했다. 아마 뫼르소의 범죄에 대해서보다도 뫼르소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법정은 범죄사실 보다는 피고인 자체에 대한 평가로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양쪽의 변론은 큰 차이가 있었던가? 변호사는 두 팔을 쳐들어 올리고 유죄를 인정하되 변명을 붙였다. 검사는 양손을 앞으로 뻗치며 유죄를 고발하되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결론은 이미 나와 있었던 것이다. 당사자만이 몰랐던 것이다.
뫼르소는 어딘가 좀 걸리는 일이 하나 있었다. 조심을 하기는 하면서도 잘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뫼르소를 빼놓은 채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 같았다. 뫼르소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은 상태여서 뫼르소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었다. 자신의 운명이 자신에게서 벗어남을 깨닫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인 것이다. 그래서 뫼르소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로막고 도대체 피고는 누구인지 피고라는 것은 중요하며 자신도 할 말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생각해 보면 할 이야기가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뫼르소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얻는 데서 맛보는 흥미는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령 검사의 변론이 자신에게는 곧 따분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관심을 끌거나 흥미를 일으킨 것은 다만 단편적인 말들, 몸짓들, 혹은 전체와는 동떨어진 한 토막의 장광설, 그러한 것들뿐이었다. 자신의 운명조차에 대해서도 집중할 수 없는 뫼르소는 정말 어떤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