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남겨야 할 건물은 반드시 남겨야 - 배성수 / 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지난달 수인선 신포역 2번 출구 일대에 인천세관역사공원이 조성되었다. 이 자리는 1924년부터 1950년 6.25전쟁으로 건물이 소실될 때까지 인천세관이 위치했던 곳이다. 공원 안에는 세 동의 벽돌 건물이 남아있다. 인천항 화물계와 선거계, 그리고 세관창고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그 중 인천세관 역사관으로 조성되는 창고 건물은 8월 중 전시 공사를 끝내고 시민에게 공개할 예정이라 한다. 수인선 신포역 설치로 인해 철거가 결정되었다가 가까스로 살아난 지 꼭 10년 만의 일이다.
2011년 봄, 번복된 철거결정
수인선 복선 전철화 건설공사가 한창이던 2011년 3월, 신포역 2번 출구 예정부지에 있던 인천세관 창고 건물을 철거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철거될 창고 일부가 1924년 세관 이전 당시에 지어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학계와 시민사회단체는 이를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기했다. 그동안 인천세관은 창고의 서쪽과 남쪽을 벽돌 건물로 이어 붙여 하나의 큰 창고로 활용하고 있었기에 이 건물의 역사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고, 문화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공사를 주관했던 한국철도시설공단도 철거를 결정하는 데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상황이었다.
공단과 시공사 측은 이미 설계가 완료되어 노선 변경이나 신포역의 위치를 옮기기란 어렵다는 이야기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세관창고 보존에 대한 지역 여론이 거세어지면서 인천시가 먼저 움직였다. 인천시, 한국철도시설공단, 시공사 관계자와 학계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공사가 조금 지연되더라도 먼저 건물에 대한 조사를 철저히 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창고를 인접부지로 이전 복원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철거를 반대하던 지역 사회도 최선책은 아니지만 차선책으로서 이 결정을 수용했다.
2012년 가을, 원형을 유지한 채 이전한 세관창고
한동안 이 건물은 철거를 위해 설치했던 철제 빔을 몸에 걸친 채 그 자리에 서있어야 했고, 관련 전문가들은 건물의 이전을 위한 조사에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세관이 이곳으로 옮겨오기 전 해안동 중부경찰서 인근에 위치할 당시인 1911년에 그려진 창고의 신축 설계도가 발견되었다. 실측조사 결과 1911년 신축설계도의 설계대로 지어졌음이 확인되었고, 이 건물이 1924년 세관과 함께 이전해 온 것임이 밝혀졌다. 물론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라 그대로 옮기지는 못했겠지만, 처음의 규모를 유지하면서 화강석으로 만든 기초와 장식돌은 그대로 이전해 온 것으로 보였다.
이렇게 1년이 넘는 조사와 이전 준비 기간을 거쳐 2012년 9월 세관창고는 원래의 자리에서 남쪽으로 약 50m 떨어진 지점으로 옮겨졌다. 이전 과정에서 원래 있던 벽돌을 모두 재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전면과 후면 벽체를 통으로 떼어내어 옮기는 등 기존의 자재를 최대한 활용하고, 원래의 형태를 유지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2013년 10월 문화재청은 세관창고와 부속건물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2016년 수인선은 계획보다 2년 늦게 개통되었고, 당시 한국철도시설공단은 세관창고가 있던 자리에 신축된 신포역 2번 출구를 세관창고의 모습 그대로 디자인했다. 등록문화재 지정과 신포역 2번 출구의 디자인 모두 2012년 세관창고 보존을 위한 회의에서 나온 의견이었다.
2021년 여름, 그 자리에 조성된 인천세관역사공원
이전한 지 한참이 지났어도 세관창고는 철망으로 둘러싸인 채 일반에게 개방되지 않고 있었다. 보존을 위해 이전하긴 했지만, 관리 주체인 인천본부세관은 이 건물의 활용방안을 딱히 찾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민들 사이에서 기왕에 이전까지 했으면 내부도 개방해야지 철망 밖에서 건물을 보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 불만 섞인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더구나 세관 부지 안에 위치해 있어 보안을 이유로 건물까지의 출입도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던 차에 지난해 인천시와 인천본부세관 사이에 세관창고와 부속 건물, 세관 부지의 활용에 대한 협의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이 자리에 세관역사공원을 조성하고, 비어있던 세관창고와 사무실 및 경비실로 사용되던 부속건물 등은 인천세관 역사관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올해 여름 인천세관이 있던 터는 인천세관역사공원이 되어 인천시민에게 개방되었다. 앞으로 이곳을 찾는 관람객들은 많은 이들의 노력 속에 어렵사리 보존된 세관창고에서 본격적인 근대 관세업무를 처음 시작했던 인천세관의 역사를 알게 됨은 물론 근대유산 보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좋은 선례는 이어져야 한다.
10년 전 세관창고의 철거결정이 번복되고 협의와 조정, 그리고 조사를 거쳐 이전 복원에 이르는 과정은 인천의 문화재 정책에 획을 그었던 일종의 ‘사건’이었다.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지 않았던 시절, 무수히 많은 근대유산이 헐려나갔다. 근대도시 인천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유형의 자산들이 개발 논리에 밀려 사라져 갔던 시기였다. 그런 시대 흐름 속에서 철거될 위기에 처했던 세관창고가 시민 사회의 노력과 인천시의 발빠른 정책적 판단으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세관창고의 보존이 좋은 선례로 남았기에 당시 많은 사람들은 앞으로 인천에서 근대유산의 무분별한 철거는 쉽지 않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고, 근대유산의 보존은 사람들의 기대처럼 되지 않았다. 세관창고 보존이 결정된 이듬해 도원동 조일양조 공장은 주차장 조성을 이유로 철거되었고, 송월동 애경사 공장건물도 시민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헐렸다. 그 뿐이랴 신포동 동방극장, 만석동 신일철공소, 신흥동 정미소 벽돌창고, 부평동 미쯔비시 줄사택과 아베 주택 등 역사성과 장소성을 가지고 있던 근대유산이 철거되었다는 소식이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을 뿐이지 낡고 불편하다는 이유에서, 그리고 대규모 도시개발을 이유로 철거되고 있는 인천의 근대유산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세관창고 보존이라는 좋은 선례가 있음에도 근대유산의 무분별한 철거가 반복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관계자와 전문가들은 세관창고의 보존이라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급급했을 뿐, 앞으로 같은 문제가 반복될 수도 있다는 것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결국 좋은 선례를 남겼음에도 이를 제도화시키지 못했기에 그 뒤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비슷한 사례가 되풀이될 때마다 대안으로 제시되었던 ‘근대 건축유산 전수조사’나 ‘근대 건축자산 목록화 작업’ 등은 일시적인 미봉책에 그쳤을 뿐, 근대유산의 무분별한 철거를 막는 근본적인 대책은 될 수 없었다.
근대 유산이라 해서 모든 것을 남길 수는 없다. 그러나 남겨야 할 건물은 반드시 남겨야 한다. 쉽지 않은 이야기지만, 10년 전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불가능한 일만도 아닌 듯 싶다. 좋은 선례는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