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는 자유공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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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는 자유공원이 있다
  • 허회숙 시민기자
  • 승인 2021.08.23 0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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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기획] 자유공원의 역사를 생각하며

오랫만에 응봉산 기슭을 올랐다. 응봉산은 인천 중구 전동과 송학동, 그리고 송월동에 걸쳐 있는 해발 69미터 수준의 야트막한 산이다. 이 산 일대가 자유공원이다. 이 곳에는 구한 말 개항 초기인 19세기 후반에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서양인들이 조성한 공원이 있다.

초기에 ‘각국공원’ ‘서공원’으로 불리던 이 공원은 해방 후 만국공원’이 되었다.

 

 

여름을 지나는 사이 더욱 울창해진 벚나무들이 하늘이 보이지 않게 빽빽하게 들어찬 길을 걸어 올라간 꼭대기에 광장이 조성되어 있고 그 곳에 맥아더 동상이 있다.

1957년 만국공원을 자유공원으로 개명하던 해에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맥아더 동상이 세워졌다. 이 동상은 자유공원의 대표 아이템이다.

 

 

소녀시절 이래 필자는 이 곳 자유공원 부근에서 32년간 학창생활과 직장생활을 하며 살았다.

자유공원에 어린이 놀이터가 설치되었다가 수봉공원으로 옮겨가고 이 곳이 계속 정비되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맥아더 장군 동상이 수난을 당하고 이를 모면해 가는 과정도 지켜보았다.

 

 

지난 8월 15일은 우리나라 최대 경축일인 광복절이다.

나는 해방둥이로 태어나 특히 광복절의 의미를 되새기며 한평생을 살아왔다.

공교롭게도 그 날 아프가니스탄이 탈레반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외신 보도가 전해졌다.

지난 4월14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아프간 내 미군 철수를 공식화하고 철군을 시작한지 100여일 만이다.

미군 철수에 발맞춰 ‘돌아온 탈레반’이 20여년 만에 아프간 수도 카불을 무혈 입성하듯 점령해 버렸다. 1975년 사이공이 월맹에 의해 함락되면서 생지옥으로 변하고 탈출러시가 벌어진 것의 재판이 되었다.

우리가 미국과 한미통상조약을 맺은 것이 1882년 이었다. 한미통상조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2년에 ‘한미통상조약 기념탑’이 자유공원에 세워졌다. 그러구러 39년의 세월이 흘렀다.

오랜만에 찾은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은 청동판이 군데군데 쪽이 떨어지고 색이 변한 모습이다. 주변의 수목 관리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라고는 하지만 요 몇 년간 한⸳미간의 서걱거리는 분위기를 보는 듯 하다.

 

 

1950년 6.25 동란이 일어났을 때 유엔군과 미국의 참전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

까?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탈환되고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다시 1.4 후퇴가 일어나고 1953년 정전협정이 맺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국민 일부의 주장대로 종전을 선언하고 평화협정이 맺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종전이 되어 U.N군의 주둔도 미군의 주둔도 필요 없는 상황이 왔을 때 미국은 의미 없는 출혈을 감수하면서 한국에 계속 머무를 것인가?

베트남도 아프간도 평화협정과 미군 철수의 수순 뒤에 적의 수중에 떨어졌는데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여러 가지 생각에 착잡해 진 마음으로 발길을 옮긴다. 코로나로 출입이 금지된 팔각정도 벤치도 썰렁하다.

 

 

그러나 이 곳 자유공원은 구한말의 혼란과 망국을 지켜 본 곳이고 광복과 6.25의 승전과 평화를 지켜 본 곳이다.

 

 

어린이 헌장도 있고 새 우리도 있어 새싹의 희망을 갖게 해 주는 곳이다.

가을이면 단풍 길이 고즈넉한 자유공원, 인천역 쪽의 차이나타운과 삼국지벽화거리, 송월동 동화마을을 걸으며 자유와 평화, 그리고 인권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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