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스럽게 웃고 있는 돌탑 위 시인의 얼굴을 마주하며
대중적 친화감을 갖고 있는 천상병 시인의 비가 강화에 있다는 걸 최근에 알았다.
문인회 몇 명과 강화에 가는 길에 들렀다.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건평삼거리 옆 강화 나들길가에 그의 성품처럼 천진스레 놓여 있는 작은 공원, '천상병 귀천공원' 이 있다.
물 들기만 기다리는 작은 배와 함께 해안에서 보는 서해 바다는 너무 아름답다.
많은 이의 사랑을 받으며 국민 애송시가 된 귀천(歸天)이 이 건평항에서 쓰여짐을 기려 2017년에 그의 시비를 세우고 이곳을 '천상병귀천공원'이라 명명한 것이다.
귀천 시가 쓰여지기까지 그의 삶을 더듬어본다.
천상병(1930~1993)은 일본에서 태어나 경남 마산 자랐다. 서울대 상과대학에 입학했으나 1954년 중퇴하고 문학에 전념했다.
마산의 바닷가를 늘 그리워했지만 여비가 없어 가까운 강화에 자주 왔다.
아버지 어머니는 / 고향 산소에 있고 // 외톨배기 나는 / 서울에 있고 // 형과 누이들은 / 부산에 있는데, // 여비가 없으니 / 가지 못한다. // 저승 가는 데도 / 여비가 든다면 // 나는 영영 / 가지도 못하나? // 생각느니, 아, /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천상병, 「소릉조(小陵調)」, 『새』(조광출판사, 1971)
그런 어느 날 건평나루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끄적인 것이 그 유명한 귀천(歸天, 『새』 1971)이다.
천상병은 1967년 동백림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의 옥고를 겪고 풀려났다. 하지만 고문의 후유증으로 폐인이 되다시피 하여 4년여의 떠돌이로 보내다 1971년 어느 날 거리에서 쓰러진다. 행려 병자로 오인된 그는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된다.
행방이 묘연한 천상병이 죽은 것으로 생각해 시인 박재삼이 '귀천'(시집 『새』 1971)을 천상병의 유작으로 발표함으로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그는 42세가 되도록 독신으로 가난, 주벽, 무절제한 생활 등 오랜 유랑생활을 하다 1972년 친구의 손아래 누이인 문옥순과 결혼하여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 다방을 운영한 부인의 지극한 보살핌 속에 1984년에는 시집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1987년에는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을 내놓는다.
그의 문학성은 마산중학교 5년인 1949년 죽간(竹筍)에 시 공상(空想)이 처음 발표되면서 드러났다. 그는 곧 문학의 길로 들어섰으며 다수의 시집, 산문집, 동화집 및 유고집이 있다.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 /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 이 햇빛에도 예금 통장은 없을 테니까.······ / 나의 과거와 미래 /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 내 무덤가 무성한 풀잎으로 때론 와서 / 괴로왔음 그런 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 씽씽 바람 불어라.
천상병, 「나의 가난은」, 『새』(조광출판사, 1971)
공원 안에는 '그리운 금강산'을 작사, 작곡한 강화 출신 한상억과 최영섭의 노래비도 함께 있다.
건평삼거리에서 동쪽 양지방향으로 200m 정도 가면 조선 후기 문신이며 문장가인 이 고장 출신 이건창의 묘도 함께 볼 수가 있다.
역사의 고비고비에서 나라를 구한 구국의 혼이 서려 있는 강화도에서 문장가와 음악가 등 예술의 혼도 함께 만나고, 서해에 떨어지는 낙조의 아름다움까지 맛보며 '강화 나들길'을 여유롭게 걸어 보기를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