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양수 선생 - 인천예총이 걸어온 길(상) / 이원규 소설가 대담·집필
시작하는 말
김양수(金良洙) 선생은 1933년 인천에서 출생해 외길 문화예술계에 몸담으셨다. 김동석(1913~?)이 1950년 전쟁 중에 월북한 이후 전국적 명성을 갖고 문학비평 활동을 한 분이며, 올해 90세로 인천 문화예술계의 대표적인 원로이시다.
선생은 인천중학교 재학 시 담임이었던 조병화 선생의 영향으로 문학을 동경하게 되고 문화예술에 빠져들었다. 동인천역에서 가까운 참외전거리에서 목재업을 하던 선친이 교유한 사람들 중 좌익 인사들도 있어서 죽산 조봉암, 이승엽, 극작가 함세덕, 소설가 송종호, 시인 배인철 등의 풍모와 일화를 선명히 기억하고 있기도 하다.
1950년 스승 조병화 선생이 인천문총을 이끌고 있을 때 그분 지도를 받으며 문학 활동을 시작한 터라 해방공간 인천 문화예술계의 동향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1964~1966년, 1972~74년, 1977~1982년 한국문인협회 경기지부장을 지냈고, 1982년 인천예총 승격 후 그 부지부장도 몇 차례 역임하셨다. 1988년부터 수년간은 한국예총 사무총장을 맡으신 바 있다.
선생의 생애사와 인천문단사 관련 구술은 이미 인천문화재단 사업에 포함되어 채록된 바 있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1950~1970년대 인천예술사 낙수(落穗) 거리들과, 1980년대 초 한국예총 경기지부에서 벗어나, 한국예총 인천지부로 새롭게 확대 창립된 시기부터 2000년까지의 뒷이야기를 중심으로 듣기로 했다.
세 차례 발간된 『인천시사』나 1997년 발간 『인천예술50년사』에 10개 장르 단체에 관한 기술은 많으나 상위단체인 예총 관련 기술은 적다. 이 대담을 통해 인천예총 역사의 빈자리를 메우고 복원할 필요가 있다. 발간사업이 시작된 『인천문화예술40년사』에서 상세히 기술될 것이지만 그 이면사도 중요하다.
20개 설문지와 8쪽 분량의 설문 배경 관련 자료를 미리 보내드렸다. 대담 내용이 중요하고 흥미로울 것으로 예상되는데다 예우해드려야 한다는 인식 때문에 인천문화재단의 이현식 정책실장과, 『인천문화예술40년사』편찬위원회 책임간사인 김창수 박사, 대담원고를 사전 게재할 인천의 대표적인 뉴스 미디어 인천in의 송정로 대표가 동석했다.
선생께서 대체로 잘 기억해 구술하셨으나 연로하신 탓으로 일부는 잊으신 게 있어서 이후 세 차례 전화대담을 해서 보완했다.
이원규: 선생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2016년 여름엔가, 시립박물관 이경성 선생 좌상 건립 때 뵙고 6년 만입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신지요? 지금 서울 구로구 개봉동에서 아드님과 사시는데 인천에도 가끔 오시는지요?
김양수: 귀가 잘 안 들리지만, 기력은 나이에 비해 좋은 편입니다. 인천을 요새는 자주 못 옵니다. 오랫동안 일했던 문화재위원도 내놨으니까요. 공적인 일은 거의 없고 친척들 일로 가끔 옵니다. 친구들은 거의 세상 떠났어요.
이원규: 선생님은 인천 문화예술계의 최고 원로이시므로 여쭐 게 산처럼 많습니다. 비평 활동을 시작하신 1950년대부터 상세히 여쭤야 하지만 이번 책이 1981년 직할시 시작이 기점이라 그 시기는 압축해서 여쭙니다. 1997년 발간『인천예술50년사』가 2,000쪽 이상으로 방대하고, 이번 책 『인천문화예술40년사』도 여러 권 분량으로 매우 상세한 기록들을 담게 될 겁니다. 오늘은 선생님께는 인천예총 이면사를 중심으로 여쭙겠습니다.
김양수: 인천예총 이면사 중심, 알았어요. 이 선생이 보내준 노트와 설문지 받아 준비했어요. 기억나는 대로 말할게요.
직할시 이전 인천 예술단체
이원규: 고맙습니다, 선생님. 먼저 1981년 이전 이야기 듣고 넘어가려 합니다. 광복 후의 인천예술단체는 1949년 문화계 우파 인사들이 조직한 인천예술인협회, 6‧25 전쟁 직전의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문총) 인천지부와 그분들이 조직한 문총구국대도 있었습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뒤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가 군사정부 주도로 만들어지자 예총 경기지부에 속하게 되고, 1981년 직할시가 되면서 다음해 예총 인천지부로 승격했습니다. 선생님, 인천 문총, 한국예총 경기지부 시절에도 여러 장르 단체가 대의원을 보내면, 그분들이 모여서 회장을 추대하거나 선출하고 그랬겠지요? 미리 이분 추대하자 물밑 의논하고 그랬나요? 요새처럼 극성스럽게 선거운동하고 그랬나요?
김양수: 원래 예술인들은 각자 뛰지, 조직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프랑스 영국 다 그렇잖아요? 공산주의 나라 소련이나 중국이 그렇고, 군국주의 시대 일본이 그랬지요. 예술을 통치의 수단으로 여겼지요. 우리나라가 예총 같은 예술가 조직을 가진 건 일본 강점기의 관행이라고 봐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문인협회, 미술협회, 음악협회 등 장르 단체에는 사람이 잘 모이지만 상위조직인 예총에는 응집되지 않아요.
지금도 비슷하지만, 그때는 예술만 해서 먹고살기 힘든 시대였어요. 식구들 부양하며 살아가기 힘든 시대였지요. 그래서 사정이 좀 낫거나 유난히 책임감 강한 사람들이 떠맡듯이 예총 감투를 썼지요. 예나 제나 단체에 소속하지 않고 작품에 열중한 분들도 많아요.
이원규: 그렇군요. 1981년 직할시 승격 직전까지 역대 대표를 보면 문총위원장은 1대 표양문 시장이 문학인으로서, 2대는 김정렬 시장이 국악인으로서 맡았습니다. 두 분이 실제 활동하거나 소양이 있기는 했지만,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맡아준 걸로 보입니다. 표양문 시장은 1920~30년대 문예지에 이런저런 글을 내놓고 뒷날 『시와 산문』동인에 참여한 문인이기도 했지요?
김양수: 그분은 그랬어요. 인천 문총은 6‧25 전쟁 직전에 만들었는데 표 시장이 앞장섰고 역대 시장들이 맡았어요. 표양문 시장이 글도 쓰고 동인 활동도 하긴 했지만, 우리 같은 본격 문인은 아니잖아요. 예술인들이 추대해서 김정렬 시장, 뒤에 윤갑로 시장이 맡아준 걸로 이해해야 합니다.
문총 본부도 문총구국대도 대중일보사 2층이 비어 있어서 거기 자리 잡았는데 표 시장이 바빠서 못하잖아요. 그래서 신태범 박사를 부회장 앉혔는데 전쟁으로 다 허물어진 병원 고치고 복원하느라 그 양반도 정신없어서 결국 이경성 박물관장이 앞장서서 했지요. 그 아래 조병화 선생이 총무국장, 평회원으로 검여 유희강 선생, 장인식 선생, 우문국 선생, 조수일 선생 등이 앞장서 행사 추진하고 그랬지요.
한상억 선생은 전쟁 중에 어쩌다가 좌익 쪽에 끌려 들어가 입지가 어려웠는데 장인식 선생이 도왔어요. 표양문 시장 비서를 한 일로 끗발이 서니까 한상억 선생을 표면에 나서도 되게 도왔어요. 장인식 선생은 시청 문서과장 자리 꿰차더니 시립도서관 관장으로 갔어요.
이원규: 선생님, 제가 다닌 중고등학교가 시립도서관과 같은 율목동에 있어서 거기 가면 장인식 관장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문국 선생님은 우선덕 소설가의 부친이시지요. 저 중학교 때 미술 가르치신 은사님이시구요. 조수일 선생님은 제 친구 조우성 시인의 부친이지요. 경기매일신문 편집국장, 주필 지낸 분이지요. 좋은 단편소설을 여러 편 남기셨습니다. 김정렬 시장은 제 아버지가 서곶출장소장 하실 때 서곶에 순시하러 검은색 찝차 타고 오셨는데 우리 집에 두어 번 들르셨어요. 그분이 국악을 하셨다는 말씀은 아버지한테 못 들었습니다. 그분이 문총 위원장 맡는 것도 역시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되겠지요?
김양수: 그런 거예요. 이 선생도 나이가 칠십 줄이라 그분들 기억하네요.
이원규: 선생님, 그다음 예총 경기지부장은 1대가 사진작가이자 의사였던 이종화 선생, 2대가 시인 한상억 선생, 3대가 다시 이종화 선생, 4대부터 8대까지가 서예가 박세림 선생, 9대는 윤갑로 시장, 10대부터 12대는 다시 한상억 선생, 13대부터 14대가 이철명 선생, 1981년 직할시 승격 후 예총 인천지부장은 1,2,4대가 수필가 김창황 선생, 3대가 음악가 김순제 선생, 다음이 무용가 이선주 선생, 이분들이 인천예술의 주축이었지요?
김양수: 내가 아까 말한 대로 총대 메듯이 책임진 분들이구요. 그분들 말고도 거물선배님들이 있었어요. 고일 선생, 검여 유희강 선생, 이경성 선생, 조병화 선생 같은 분들 말이지요. 동정 박세림 선생이 예총 지부장 하실 때가 기억나요.
이원규: 기록을 보면 동정 선생은 1965년 4대부터 8대 1970년까지 예총 경기지부장 하셨군요. 선생님이 부지부장 하셨지요?
김양수: 그때 연예협회 소속 이승하라는 사람이, 그 사람이 한때 가수도 하고 무슨 연기 같은 것도 했는데 인천예총에 들어와 실무를 맡았어요. 동정 선생 집에 가서 아주 살다시피 했어요. 내가 그때 부지부장 했는데, 동정이 잘 나가는 서예가이시니까 서숙 일하랴 자기 작품 활동하랴 바빠 가지구 중요한 일 있을 때만 나오고 안 나오니까 대신 책임지고 일할 부회장 하나 지명하라 하니까 나를 지명하셨단 말이에요. 그래서 내가 실질적으로 회장 노릇을 한 게 많아요.
이원규: 그러셨군요. 동정 선생은 쉰 살도 못 살고 가셨어요. 선생님, 인천 예술은 선생님과 제가 몸담은 문학 장르보다 미술이 강하고, 그건 서예가 미술 장르에 들어갔기 때문인 듯해요. 검여 유희강 선생을 필두로 동정 박세림 선생, 우초 장인식 선생, 송석 정재흥 선생, 무여 신경희 선생까지 쟁쟁했지요?
김양수: 화가들도 쟁쟁했지만 서예는 참 대단했지요. 전국 최고지요. 동정이 강화 출신이고 선친이 『강도지(江都誌)』 쓴 건 이 선생도 알지요?
이원규: 네, 동정의 부친이 박헌용 선생이지요. 동정 선생 동정서숙이 내동 창제한의원 위에 있다가 가톨릭회관 건너편 양다방 위엔가 있었던 게 기억납니다. 저기 가서 나도 서예 배워야지 했는데 소설에 열중하느라 갈 수 없었습니다. 돌아가신 게 1975년 76년쯤이지요. 90킬로가 넘는 거구이셨는데 창제한의원 신경희 선생에게 20킬로나 뺐다고 자랑하시고 나서 육고기를 한꺼번에 많이 드시고 급서하셨다는 걸 들은 적 있습니다.
김양수: 쉰 살도 못 살았어요. 그분은 동정서숙에서 훌륭한 제자들을 키워냈어요.
이원규: 네, 선생님. 관호 최원복, 청남 전도진이 대표적이지요. 선생님, 이제 이야길 돌려서요. 이경성 ‧ 조병화 두 분이 인천에 더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1950년대 초반에 떠나셨지요. 이경성 선생은 싸리재 출신이고 제물포구락부 건물에 있던 시립박물관 관장이라는 튼튼한 직업이 있었고, 조병화 선생은 부인이 전동에서 김준산부인과를 열고 있고 인중 교사라서 인천에 길게 뿌리내릴 만했는데요.
김양수: 두 분은 일본 유학파라 유난히 친했는데 인천 떠난 일, 모두 비화가 있어요. 이경성 선생 그 양반이 6‧25 때 피난 못 갔어요. 수복된 뒤, 민주당 곽상훈 씨가 인천 유지 여남은 명을 모아서 어떤 단체를 만들었어요. 거기 이경성 선생 이름도 들어갔단 말이에요. 자유당 사람들이 꼬투리를 잡아 부역으로 몰았어요. 경찰이 10시까지 출두하라 통지해서 가 보니, 당신 왜 피난 안가고 인공 치하에 남았느냐? 인민군 장교가 박물관 관장실에 떡 버티고 앉아 있었다는데 당신이 박물관을 들어 바친 게 아니냐? 따진 거예요. 그런데 사실 선생은 낮에는 고분고분하게 있고, 박물관 소사(잡역부)로 있던 사람, 그이가 송림학교 옆 창고 주인이었는데 그 사람을 시켜 밤마다 중요한 문화재를 송림동 창고로 옮겼어요. 그런 공로자를 부역죄로 몰아간 거지요. 이경성 선생은 그렇게 내쫓긴 거예요.
열심히 듣고 메모하던 김창수 박사가 조병화 선생에게 직접 들은 일화를 말했다. 그 소사 아저씨가 박물관 언덕에서 사과 좌판을 열었고 이경성 조병화 두 분이 자주 사서 먹었고 그게 조병화 선생의 시 「팔랑버들」에 있는 ‘사과’라는 것이었다. 인천 문인들이 대개 아는 그 시는 이렇다.
늦은 아침
바다에 둘러싸인 계단과 계단을 올라
어린 팔랑버들이 무수히
깔린
언덕을 사과를 씹으며
박물관 관장과 나는 가을을 걷는다.
이원규: 선생님의 스승이신 조병화 선생님은 왜 떠나셨어요?
김양수: 인천중학 길영희 교장이 무슨 수단으로 손에 넣었는지 적산가옥을 여러 채 손에 쥐고 실력 있는 선생 스카웃하는 미끼루다 써먹었지요. 조병화 선생은 동경고사(도쿄고등사범학교) 출신이잖아요. 당대 최고 선생이지요. 길 교장이 관동에 있던 아주 좋은 적산가옥 한 채를 덥석 안기는 바람에 넘어갔어요. 그 덕분에 내가 인천중학에서 그분에게 배웠지요. 근데 나중에 딴 선생 또 스카웃해 와서 필요하니까 그 집 도로 내놔라 한 거지요. 그 바람에 조 선생이 실망해 떠난 거예요
이원규: 길 교장께서 그랬군요. 선생님, 예술인들 가난하던 시절, 밥값 술값 내주고 행사 때 기부금이나 밥값 말입니다. 신태범 박사나 공립의원 원장이던 이종화 선생은 의사니까 넉넉히 내놨나요?
김양수: 아무래도 두 분이 많이 냈지요. 신 박사는 분명하고 확실한 명분이 있는 경우 내셨고 이종화 선생은 반대였어요. 사실 두 분 돈 내주신 거보다는 십시일반이 많았지요. 신포주점이나 백항아리 같은 선술집 말이에요.
이원규: 선생님, 옛날이야기 더 듣고 싶은데 그만합니다. 직할시로 승격하던 1981 당시 신포동 문화회관, 공보관이라고도 불렀지요. 거기 인천문화원과 예총 경기지부 있었고 작은 공연장 있었고 공간이 좁아 산하 장르 단체 본부는 자리가 없었지요?
김양수: 그랬어요. 문협, 미협, 음협 등 단체는 뭐 사무실이 없었어요. 전부 모일 때는 식당에서도 하고 문화회관에서도 하고 그랬어요. 장르 단체가 사무실을 가진 건 1982년 6월 개관한 수봉문화회관 때부터였어요. 직할시 승격 후 인천예총이 새 출발을 하게된 것이지요.
이원규: 선생님, 1981년 직할시 직전 경기도청은 수원에, 예총 경기지부는 인천에 있었는데 인천예술 비중이 경기도 전체의 몇 퍼센트나 됐을까요?
김양수: 인천이 90퍼센트 이상이었어요. 지금은 경기도가 수도권 인구 집중 때문에 커졌지만, 그 시절 인천 외 문화예술행사는 한글날 세종대왕릉 한글백일장밖에 없었어요.
이원규: 선생님, 김중석 교수께서 지난 5월에 작고하신 게 생각나서 음악 짚고 나가겠습니다. 인천관현악단이 1947년엔가 창단연주를 했고, 최영섭 선생이 내리교회 성가대를 지휘해 합창이 발전했고, 1960년대에 김중석 선생과 최영섭 선생이 애써서 인천필하모니를 만들었고, 1966년 인천시향이 윤갑로 시장의 결정으로 창단된 거 아닙니까? 지휘자는 김중석 선생이구요. 몇 해 뒤 임원식 선생이 오셨고 대단했지 않습니까?
김양수: 시향은 김중석 공로가 커요. 내 인중 후배이고 부친이 내 아버지처럼 목재업 하셨지요. 인천예총 산하에 있던 시향은 인천의 자랑이었지요. 임원식 시대에는 부산시향 대구시향보다 잘해서 인천의 자랑이었지요. 윤학원의 합창도 대단했지요.
이원규: 저 고등학교 때 윤학원 선생은 동인천고에 계시면서 극동방송 음악프로 진행했던 게 기억납니다. 그밖에 연극, 연예, 사진 등 다른 장르도 대단했잖습니까?
김양수: 그랬지요.
(상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