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연극인 이재상 – 연극인생 40년이 본 인천연극 40년(하) / 송정로 인천in 대표 대담·집필
송정로 : 그러면 아시아희곡축제는 어떻게 하게 됐지요?
이재상 : 유네스코 산하에 1948년에 설립된 ITI(국제극예술협회 International Theatre Institute)가 있어요. 그 아래 극작분과(IPF, 국제극작가포럼)가 있는데, 아주 독특하고 활발합니다. 2017년 한국의 ITI 선배들이 제가 일본에서 했던 활동들을 보고 들어오라고 제안했어요. 희곡분과를 맡으라고. 그 즈음 ITI 세계연극대회가 스페인에서 열렸어요. 이 세계연극대회는 항공비도 자비로 가야하고, 운이 좋아도 일부 인원만 며칠 숙식을 해주는 게 다에요. 부담이 가기는 하죠.
처음 맞는 세계대회라 큰맘 먹고 갔습니다. 거기 동행했던 김창화 교수(ITI 한국부회장)와 아시아희곡축제를 조직해보기로 한 거예요. 초청 조건은 ITI과 똑같이. 그런데 비용 문제로 ITI도 그렇고, 달리 어느 단체도 주최할 엄두를 못 냈어요. 처음에는 조직을 따로 만드는 시도도 해봤지만, 결국 우리 MIR 레퍼토리 극단이 주최하고 ITI가 협조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죠. IPF 사무국장이 스위스 분인데 전 세계 멤버들에게 공문을 보내줘서 돈은 지원받지 못하지만 공신력이 확보돼 좋은 작가들의 참가 신청이 많이 들어오는 편입니다.
송정로 : 90년대 인천 연극이 그렇게 스러지고, 2000년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천 연극의 흐름은 어땠을까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어려움도 물론 많았으리라 생각하지만... 밖에서는 사정을 잘 모르겠더라구요.
이재상 : 일단 무한경쟁 시대의 돌입이라 할 수 있겠죠. 1994년 인천종합문예회관이 개관했는데, 이후 시와 구가 문화회관 등의 공간을 짓고, 자체 기획 프로그램을 시작했지요. 시민들의 문화 향수권 확대라는 점에서는 좋은 취지였겠지요. 그렇지만 순수 문화예술의 발전이라는 다른 측면도 함께 생각해야할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연극하는 사람들(다른 순수예술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인천의 극단들에게는 전국의 공연 팀과 함께 무한경쟁을 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 한 셈이에요. 문화 공간들의 기획공연이 강화되면서 공연예술계 전반으로 같은 상황에 처했겠지만, 상대적으로 인천의 팀들에게 더 혹독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기획공연에 선정되는 인천에서 제작된 작품의 수가 매우 적다는 점이지요. 이해는 합니다. 담당자 입장에서 보면 어차피 선정이 안 되어도 인천에서 공연은 할 테니 굳이 인천작품을 선정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일 수도 있고요. 거기다 인천 자체 작품의 경우, 아무래도 서울서 올리는 작품보다 인지도가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공연 기획 담당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실적도 있고 하니까, 아무래도 인지도 높은 작품 위주로 프로그램을 구성할 수밖에 없어요. 상업적 인지도가 높은 작품들이 많이 선정되는 겁니다. 물론 이게 기본적인 시장논리이긴 하지만, 순수예술 입장에서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 되는 거죠.
그걸 고쳐나가려면 현재의 실적 평가 방식이 바뀌어야 하는 거죠. 단지 객석 점유율로만 평가할 게 아니라 지역 공연예술에 어떤 영향이나 발전적 요소가 있었는지를 같이 평가한다거나 하는 방식으로요.
또 한편으로, 문화공간은 조금 늘었지만, 실제 공연장 수는 그리 많지 않다는 점, 그리고 극단의 수는 많이 늘었는데 극단 수의 증가가 관객의 증가로는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과 지원금은 그대로라는 점에서 어려움이 가중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역 극단으로서는 이중고에요, 지원금은 제작비의 쌈지 돈 정도인데, 그마저도 단체가 늘어나면서 선정에 어려움이 많고. 기획공연 선정은 무한경쟁으로 어려운 상황이고. 어쩌다 인기가 있는 작품이 나와도 공연장 부족으로 장기공연은 아예 불가능한 상황인거죠.
주 52 시간제가 시행되었음에도 인력확보 예산은 늘지 않았기 때문에 공공 공연장 중에는 주말 대관이 불가한 경우가 점점 늘어갔습니다. 거기다 공공극장은 다양한 팀에게 대관도 열어야 하고, 자체 기획 공연도 해야 하고 하다 보니 결국 기존 공연장의 대관일 수가 많이 줄어든 셈이 되는 거죠. 게다가 민간극장은 운영난 때문에 거의 고사 상태 아닙니까? 공연할 극장이 모자라는 상황이 된 겁니다.
제작비 확보가 어려운 상황에서 외부 팀과 무한 경쟁을 해야 하고, 공연장이 적어 충분한 공연일 수를 확보하기도 어려운 상황인 거죠. 심한 경우 전석 매진이 돼도 제작비 충당이 안돼요. 대안으로 연극전용극장 건립 얘기가 몇 번 나오기도 했고, 실제 추진되기도 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보면 끝까지 가지 못했고 완성된 극장들도 복합공간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순수 공연예술 쪽은 점점 더 그런 문제들이 심화돼 왔습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기점으로 한류바람이 강해져서 세계시장은 늘어났지만, 또 한편으로는 문화예술을 비즈니스적 측면으로만 보는 관점이 더 심화되었으니까요.
순수 예술은 관객이 우리보다 훨씬 많은 유럽의 경우에도 자생력이 매우 약합니다. 하지만 그런 기초예술이 튼튼해야 예술의 지속 성장이 가능하고, 상업예술도 더 성장을 하는 건데, 최근의 문화정책 대부분이 아직도 자생력을 기준으로 하는 시장 논리적 관점에서 많은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또 유럽 등과 같이 예술가 개인지원을 강화해서 기초예술을 지킨다는 관점 보다는 작품지원에 중점을 두고 있지요. 작품 중점 지원은 아무래도 소모성으로 끝날 가능성이 많고 작품 제작을 하다보면 예술가에게 가는 지원금은 실제로 그리 많지 않아요. 우리나라도 앞으로는 예술가 직접 지원 중심으로 점차 지원정책을 바꾸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송정로 : 2008년 창단한 극단 미르(MIR) 레퍼토리가 '레퍼토리 시즌제'를 시도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순수예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입니다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재상 : 사실 많은 작품 대부분이 1회성 공연에 그치고 있지 않습니까? 작품을 하나 연습 하는데 2~3개월 정도 소요되는데, 사실 그 정도 연습으로 작품의 숨은 기호들을 완벽하게 찾아내 표현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라요. 그렇다고 여러 여건 상 한 작품을 장기 연습하기도 어렵구요. 그런 의미에서 레퍼토리 시즌 제는 많은 단점을 해결 할 수 있는 대안입니다. 레퍼토리를 선정, 공연해서 시즌에서 인정받은 작품들은 다음 시즌에 반복해서 공연해가면서 밀도를 높이고, 또 새로운 레퍼토리를 발굴해가는 걸 반복하는 거지요. 이렇게 해서 몇 년 정도 살아남은 작품이 나오게 되면 그 작품의 에너지는 상당해집니다.
창단 후 4년 정도 레퍼토리 시즌제로 공연했는데, 일정 부분, 성과가 있었다고 자부합니다. 확실히 몇몇 작품은 반복 공연 되면서 밀도가 매우 상승했고. 좋은 평가도 받았습니다. 덕분에 이름이 알려져 지금까지 재공연 되는 작품도 많고요.
문제는 생각 못한 데에서 발생했습니다. 저희 전용극장이 없다 보니 대관을 해서 공연을 진행해야 했어요. 길어야 한 달 정도, 그것도 매우 어렵게 빌렸는데, 아까 말씀드렸듯 공연장 확보가 매우 어렵습니다. 한 달 동안 네 작품을 공연해도 관객은 한 작품 공연 관객보다 약간 더 많은 정도밖에 안됐어요. 보통 한 달에 한 번 정도 연극을 보는 관객도 많지 않은 상황이니까 두 작품 이상 보는 관객이 거의 없는 거죠. 외국의 시즌 제 공연을 살펴보면 한 시즌이 최소 2개월에서 3개월 정도는 되거든요.
결국, 전용극장이 확보되기 까지는 시즌제는 무리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레퍼토리 극단은 포기를 안했지만 시즌제는 잠정 휴지 중이에요. 물론 기존 레퍼토리도 계속 반복 공연은 하고 있지만, 정기적 시즌 제 공연이 아니다보니 전 배우들의 역할 고정이 힘든 상황입니다. 그럴 경우 밀도 향상에 한계가 있어요. 결국 아직은 반만 레퍼토리 극단인 셈이죠. 극단 전용극장이 확보될 때 까지는 말입니다.
송정로 : 2012~2014 인천연극협회 회장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맡게 되셨나요. 임기 중 특별히 생각나거나 기록할 만한 일들이 있다면 어떤 것들을 들겠습니까?
이재상 : 회장직을 제가 특별히 하고 싶어 했다기보다는 그 당시 맡을 사람이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떠밀리다시피 맡아 했지요. 말씀드렸듯 해외 작업이 반 가까이 되는 여건에서 잘 할 자신도 없었구요. 그래서 단 한 번의 임기만 마치고 그만 두었던 것이고요.
특별한 일이랄 만한 정도의 일은 없었습니다. 인천예총이 갖고 있던 ‘문학 씨어터’의 연간 기획 기금을 반 정도도 연극협회로 돌려 일 년에 두 번 정도의 연극협회 기획 시즌 공연을 만든 일, 예총 합동공연을 연극협회가 주관해서 만든 일, 뭐 그 정도랄까요?
단지 그 때 느낀 점은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협회라던가 총연합이라던가 하는 연합단체의 시기가 아니라는 점이었어요. 그 전에는 개인의 힘도 약하고 개별단체 지원도 약하니까 협회가 나서서 이것저것 했습니다만 지금은 모든 지원이나 기금이 개별 단체 중심이고, 오히려 협회가 개별 단체랑 경쟁을 해서 기금을 받아야 하는 지경이니까요. 그러니 회원이나 단체가 협회에 해야 하는 의무에 비해 협회가 회원이나 소속 단체에 해 줄 일이 점차 줄어드는 거에요. 따지자면, 지금의 구조는 낡은 구조 아닐까 하는 것이죠. ‘구조가 변할 수밖에 없겠다’ 라는 생각을 했어요.
송정로 : 더 넓혀서, 1981부터 현재까지 인천 연극계의 중요한 장면, 사건들을 든다면요.
이재상 : 글쎄요... 우선 1982년을 기점으로 한 소극장 전성시대. 그리고 1990년의 시립극단 창단과 기존 극단의 몰락. 1998년 이후 김대중 정부에서 시작된 문예지원 확대. 2004년 인천문화재단 설립 정도를 들까요? 모두 연극계에 큰 영향을 미쳤지요.
앞의 두 건은 이미 말씀 드렸고, 1998년 문예지원 확대에 대해 말씀 드리면, 그 시기 지원 금액이 크게 늘었습니다. 물론 그 이유도 있지요. 이미 현장에서 극 생산이 프로듀서 시스템(제작자 중심)으로 많이 지나온 후라 그 전처럼 작은 돈으로는 제작이 불가능하던 시기였거든요. 다른 한 편으로는 지원 금액 확대가 거꾸로 프로듀서 시스템을 더욱 강화시키기도 했고요. 2004년 인천문화재단의 설립은 연극 뿐 아니라 인천 문화계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니,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송정로 : 교육연극, 마임연극을 거쳐 이민자(이중언어연극) 연극, 길거리 연극(15분 연극제) 등등... 인천에서도 연극의 장르의 확장은 계속돼왔습니다. 어떤 형태들이 더 기억나시는 지요.
이재상 : 연극적 실험은 사실 지역과 관계없이 어디서든 다양한 형태로 시도되고 있지요. 거기에 특별히 지역적 특색과 연결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지만, 이중언어 연극제와 15분 연극제는 인천의 특색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중언어 연극제의 경우 여러 나라, 여러 지역사람들이 모여 사는 인천의 특성상 다른 문화에 관대한 부분이 발전해서 그들과 더욱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진화한 경우이고, 15분 연극제는 구도심에서의 지역적, 지리적 특성과도 관련이 있지요. 어쨌든 그런 점에서 인천이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서울보다 실험에 더 적극적인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지요.
이런 시도들이 단지 연극 뿐 아니라 예술 전반에 대한 시각을 확장시켜왔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죠. 현대사회는 더욱 다양해지는 만큼 그 반발로 모든 것을 규격화하려는 욕구도 커지고 있지요. 사실, 예술계에 조차도 그런 잣대를 들이미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그런 점에서 시야의 확장과 사고의 확장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은 자유로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유롭기 위해서는 특정 관점에 얽매이면 안 되겠지요. 저는 인천의 이런 시도들이 그런 면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작업들이라 생각합니다.
송정로 : 미르 레퍼토리를 비롯, 인천 극단 활동이나 연극 공연에 있어 새롭거나 창의적인 시도였다고 생각하시는 것들이 있다면 어떤 것들일까요?
이재상 : 글쎄요... 제가 인천의 다른 극단의 작업을 모두 본 것이 아니라서... 제가 기억하는 한에서 말씀을 드리면, 소극장 전성기 시절 ‘경동예술극장’에서 꾸준히 실험적인 작품들이 올랐던 것이 우선 기억에 남습니다. 베케트나 아라발의 작품들도 있었는데, 자체공연도 있었고 대관도 있었지만 가장 다양한 형태의 연극이 시도됐던 공간이라 말하고 싶어요.
그리고 모든 극단의 고민은 대부분 비슷할 거라 생각합니다. 시대가 변하는 만큼 극단들도 뭔가 계속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하니까요. 그 중에 기억이 남는다면 극단 ‘집현’의 전통과의 결합, ‘아트 팩토리 사람’의 신체기호의 극대화, 그리고 극단 ‘나무’와 극단 ‘미추홀’의 환경문제를 주제로 한 어린이극 연작 시리즈 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 중 ‘집현’ 과 ‘나무’는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새로운 시도도 중요하지만, 그 작업을 지속하는 것 또한 중요하지 않나 생각해보게 됩니다.
극단 미르 레퍼토리의 경우는 보수와 실험적 색깔을 같이 갖고 있습니다. 우선 보수적인 면에서 보면 저희 극단은 고전에 관심이 많습니다. 리얼리즘의 효시라 볼 수 있는 안톤 체홉의 ‘엉클 바냐’와 ‘갈매기’를 무대에 올렸고 그 밖에 사무엘 베케트, 페르난도 아라발, 게오르그 뷔히너, 막스 프리시 등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그 당시에는 실험적이라 불렸지만 지금은 고전으로 불리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지요. 제가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저희가 기초예술의 강화를 위해 만들었다는 시립극단보다 더 고전을 많이 했다고. 우린 세익스피어를 올린 적이 없으니 작품 수로 보면 시립의 경우가 고전이 더 많겠지만, 작가나 다양성으로 보면 저희가 더 많습니다. 시립은 체홉의 작품은 올린 적이 있지만 막스프리시나 뷔히너, 베케트, 아라발은 올린 적이 없어요. 더욱이 제 기억에 저희가 올린 고전 대부분이 인천 초연입니다.
실험적인 면에 대해서는 이미지극이 많은데, 대부분의 작품이 외국 공연의 경우입니다. 아무래도 언어의 한계를 생각 안 할 수가 없으니까요. 무용과 음악, 그리고 극이나 나레이션이 결합되는 형식인데, 외국과 우리나라 같이 공연한 경우도 있지만 외국에서 공연한 경우가 더 많지요. 대표적으로 2018~2019 도쿄와 파리에서 공연했던 BARI의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밖에 형식적인 실험도 계속하고 있고, 아시아희곡축제 같은 국제 교류에도 지속적으로 챙겨가고 있습니다. 외국과의 콜라보 공연도 많이 하고 있구요. 이렇게 국제교류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냉정하게 바라보면, 저는 연극은 사양산업이라고 봅니다. 드라마나 영화 등의 기초가 되는 기초예술임에는 분명하지만 관객은 세계적으로 줄고 있어요. 아울러 상업화에의 압박은 더 심해지고 있죠. 그런데 저에게 쇼비지니스적인 작업은 잘 맞지 않아요. 그러니 상대적으로 소수가 되어가고 있는 연극적 작업을 지속하고 싶은 사람들 끼리 연대하고, 혁신해보자는 거죠. 다행히 세계도 많이 좁아지지 않았습니까? 최근 팬데믹 때문에 서로 좀 멀어졌지만.
송정로 : 이제, 마무리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연극하는 사람들이 쉽지않은 환경에서 연극을 하게되는 동력 혹은 철학이랄까,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리고 본인은 어떻게 연극인으로 40년을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재상 : 허~ 꽤나 어려운 질문인데요... 계기는 사람마다 달랐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철학도 나중에는 다 달라지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냥 연극이 좋았다’라고나 할까요? 그런 생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연극이 좋고, 그냥 무대에 서는 게 좋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죠. 그러다 그 무대나 연극에 중독되고 더 이상 길을 바꾸기에는 늦었다고 생각할 무렵부터 진짜 연극과의 만남이 시작되는 거죠.
철학적 질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글쎄요... 지금의 친구들도 대부분 비슷하지 않을까요? 단지 사회의 분위기가 다를 뿐이죠. 그 때는 더 적극적으로 말리는 사람이 많으니까 더 불타올랐던 거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사실 사회의 틈은 그 때가 더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시절을 ‘낭만의 시절’로 기억하는 거죠.
말씀드렸듯, 80년대는 연극을 하는 사람들을 사회 부적응자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매우 강했어요. 그런데 일단 90년대 들어서서 분위기가 일변합니다. 일단 겉으로 일지는 몰라도 연극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예술가’ 대접을 받기 시작했죠. 사회의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어요. 여전히 불쌍해는 하는데...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라는 느낌인 거죠.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더 이상 젊지만은 않으니 시작하는 친구들이 어떤 걸 느끼는 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야 이제 경력도 있고 하니... 속은 모르지만 일단 겉으로는 예술가 대접을 받고 있지요. 사실 연극의 특징을 생각하면 ‘무대 예술’이나 ‘연기 예술’로 가기에는 매우 어려운 벽이 있지만 말입니다. 시공간의 한계를 생각하면... 연극도 엔터테인먼트적 특징이 매우 강한 분야가 아니겠습니까?
제 얘기를 다시 하면, 철학적 신념 때문이라 할까요?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말씀드렸든, 저는 조금 어릴 때 삶의 목표를 정했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깨달음을 추구하고, 그 깨달음을 세상과 나누겠다고요. 그게 연극으로 삶의 방향을 틀면서 그대로 적용됐어요. 단지 세상과 나누는 방식이 연극으로 바뀐 거지요.
물론 나이가 들며 많이 게을러 진건 사실이지만.... 지금도 기본 삶의 기조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연극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죠. 이런 삶의 철학과 방식이 일치한다는 점에서 갈등이 없으니까 이 길을 계속 걷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던 듯합니다. 물론 다른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많았고, 지금도 존재하는 어려움도 있지만.... 삶이란 원래 만만하지 않은 법 아닙니까? 그래도 많이 게을러 진 건 사실이에요. 점점 체력도 떨어져서 작업 시간도 갈수록 줄고.... 이젠 다른 길은 엄두도 못 냅니다. 이제 와서 다른 걸 할 수나 있겠어요? 기술도 체력도 없는데... 하던 거나 열심히 해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