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우리가 놓치고 있던 인천이야기
①창영학교,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초등학교로 서다 - 배성수 / 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창영85주년사』에 따르면 창영초등학교는 1907년 5월 6일 내동 관립 일어학교의 교실 하나를 빌려 공립인천보통학교로 개교했다. 창영학교는 이날을 공식적인 개교일로 삼고 있으며, 올해로 개교 116주년이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개교일은 왜곡된 것이다. 정확히는 일제에 의해 학교 역사가 단절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학교의 개교일에 어떤 사연이 숨어 있을까?
1906년 8월 27일 ; 「보통학교령」과 공립인천보통학교
러일전쟁 승리 후 일제는 ‘을사늑약’으로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한 데 이어 조선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했다. 교육 행정도 마찬가지여서 교육을 총괄했던 학부 대신은 조선인이었지만, 일본인 고문이 실권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교육 정책은 자주권을 상실한 채 하나둘 일제의 계획대로 변해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06년 8월 27일 「보통학교령」이다. 당시 학부 대신은 을사5적 중 하나인 이완용이었다.
「보통학교령」은 기존의 「소학교령」을 대체하기 위한 것으로 학부는 9월 1일 학부령 제27호를 통해 “현재 공립소학교는 보통학교령에 의해 설립하는 공립보통학교로 인정하며, 그 직원도 별도의 발령없이 해당 공립보통학교의 직원으로 임용한다”고 정했다.
9월 18일에 “한성부와 각 도의 관찰부에 ‘소재(所在)’하는 공립보통학교 14개교”를 학부령 제28호로 발표한 데 이어 1907년 4월 1일에는 학부령 제4호 “이날 ‘개학(開學)’하는 전국 27개 공립보통학교 명칭과 소재지”를 발표했다. 공립인천보통학교는 2차로 발표한 27개 학교에 포함되었다. 여기서 ‘개학’은 개교(開校)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창영학교의 개교일은 1907년 4월 1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보통학교령」 공포 이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1906년과 1907년 두 차례에 걸쳐 발표된 41개 보통학교 소재지 중 인천을 포함한 35개 지역에 이미 공립소학교가 운영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대한제국 학부는 4월 1일 발표한 27개 학교에 대해 일괄적으로 개교를 뜻하는 ‘개학’이란 용어를 사용했을까? 일제가 장악했던 학부는 이미 운영되고 있던 소학교를 보통학교로 인정한다면서도 「보통학교령」을 통해 민족의식 고취와 애국심 함양을 목적으로 했던 소학교 교육과정과 단절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존에 운영되던 소학교와 여기에 속한 교원, 학생들의 자격을 보통학교로 인정해야만 혼란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통학교령」의 공포는 소학교를 보통학교로 바꾸는 학제 개편이었을 뿐이다. 이는 교원(敎員) 임용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05년 10월 17일 인천부 공립소학교의 7대 교원으로 임용된 조관증(趙寬增)은 1907년 2월 12일 이승묵(李承默)으로 교체될 당시 공립인천보통학교 소속이었다. 인천부 공립소학교의 교원으로 임용된 후 보통학교로 학제가 개편되면서 공립인천보통학교의 교원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창영학교의 개교일은 공립인천보통학교를 넘어 인천부 공립소학교가 시작된 날이어야 한다.
1896년 1월 22일; 인천부 공립소학교의 시작
갑오개혁으로 근대 제도의 도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고종은 1895년 음력 2월 교육을 통해 나라의 근간을 다지겠다는 ‘교육입국조서’를 발표한다. 그리고 석 달 뒤 교사를 양성할 한성사범학교가 문을 열었다. 교육 과정은 수업 연한 2년의 본과와 6개월의 속성과로 구분했고, 그 해 12월 1일 속성과 1회 졸업생 28명이 배출되었다. 성적에 따라 여섯 명은 지금의 국립초등학교에 해당하는 관립소학교에, 나머지 22명을 공립소학교의 교원으로 배치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직 그들을 받아줄 소학교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한성에 설치된 네 곳의 관립소학교는 이미 여름부터 학생 모집에 들어가 교원 배치에 무리가 없었지만, 지방의 경우 학생 모집은커녕 학교 설립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해를 넘겨 1896년 1월 22일 마침내 조선 정부는 한성사범학교 속성과 1회 졸업생 변영대(卞榮大)와 이항선을 각각 인천부와 대구부 공립소학교 교원으로 발령한다. 당시 교원 발령은 인천과 대구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정부가 사범학교 졸업생 해소 차원에서 임의로 교원을 배치하고자 했다면 졸업생 모두를 일시에 임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관립소학교 교원으로 근무할 성적우수자를 제외한 22명의 1회 졸업생은 2회 졸업생이 배출되는 10월 말까지 인천과 대구를 비롯해 전국 14개 지역에 순차적으로 배치되고 있었다. 당시는 갑오개혁으로 전국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던 때로 교원이 배치된 14개 지역 중 10개는 한성부, 인천부, 대구부 등 관청 소재지였고, 파주, 양주 등 나머지 네 개 지역은 군에 해당하는 고을이었다.
이로 미루어 교원이 임용된 지역은 행정 단위나 인구, 재정 규모와 상관없이 학교 설립 준비를 마치고 교원 배치를 요청한 곳이라고 볼 수 있으며, 첫 교원이 배치된 인천과 대구에 최초의 공립소학교가 설립되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창영학교의 개교일은 1896년 1월 22일이 되어야 한다.
인천부 공립소학교에는 1896년 1월 변영대가 부임한 이래 「보통학교령」이 공포될 때까지 모두 다섯 명의 교원이 임용되었고, 그 중 변영대와 조관증은 두 차례에 걸쳐 근무했다. 교원을 도와 학생을 가르쳤던 부교원도 배치되었다.
개교 2년이 지난 1898년 6월 일본 유학생 출신 남순희(南舜熙)를 시작으로 모두 15명의 부교원이 이 학교를 거쳐갔다. 교원의 평균 근무기간이 16.2개월, 부교원은 6개월로 부교원의 교체가 잦은 편이었다. 입학 연령은 만 7세~14세까지였고, 수업 연한은 심상과(尋常科) 3년, 고등과 2~3년이었다. 인천부 공립소학교는 심상과만 두고 있었고, 1898년 당시 28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었다.
1907년 5월 6일 ; 왜곡된 개교일
1907년 5월 6일은 어떻게 창영학교의 개교일이 되었을까? 이를 알려면 일제강점기 일본 측 기록을 살펴보아야 한다. 개교일이 처음 기록된 자료는 1928년 인천공립보통학교에서 펴낸 『인천공립보통학교 요람』으로 여기에는 “1907년 4월 1일 설립인가, 5월 6일 개교”라 적혀있다.
1933년 인천부가 발간된 『인천부사』의 내용은 조금 더 상세하여 “1907년 4월 1일 설립인가가 있어 하라다 사이치로[原田佐一郞]씨를 교장, 강신형(姜臣馨)을 부교원으로 임명하였다. 관립 일어학교의 교실 하나를 임시교실로 하여 학생 모집을 시작했는데 5월 6일 개교 당시 입학한 학생은 겨우 세 명이었고, 18일이 되어서야 6명이 되었다”로 기록하고 있다.
『창영85주년사』에 인용된 「기사적요(記事摘要)」의 내용은 보다 더 상세하다. 원문을 보지 못해 언제 작성한 자료인지 알 수 없지만, 인천공립보통학교라 인쇄된 용지에 일본어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1910~20년대 학교에서 만든 자료일 것이라 추정할 뿐이다. 여기에는 “4월 1일 설치 발표, 4월 12일 하라다를 교사로, 강신형을 부교원으로 임명, 4월 22일 관립 일어학교와 교섭하여 교실 하나를 임시 교실로 하여 학생 모집, 5월 6일 개교” 등의 내용이 적혀 있다. 세 개의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일제강점기 인천공립보통학교와 인천부는 4월 1일을 설립 인가일, 5월 6일을 개교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를 우리 기록과 비교하면 몇 가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일본 측 기록은 1907년 4월 1일을 ‘설립 인가일’로 보고 있지만, 1907년 발표된 대한제국 학부령 제4호는 ‘4월 1일에 개학(開學)하는 학교의 명칭 및 소재지’였다. ‘개학’의 의미를 설립인가로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또 우리 기록 어디에도 ‘5월 6일 개교’라는 내용은 등장하지 않으며 교원 임용기록에 당시 공립인천보통학교의 교원은 1907년 2월 2일 부임한 이승묵이었다. 그리고 그는 7월 1일 퇴직한다. 그렇다면 5월 6일 이 학교의 교원은 하라다 사이치로가 아닌 이승묵이어야 한다. 대한제국 『관보』에서 하라다는 1908년 1월 1일이 되어서야 공립인천보통학교 교감 및 본과 훈도(訓導)로 임명된다. 양 측의 기록이 유일하게 일치하는 내용은 부교원으로 강신형이 부임했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공립인천보통학교에 대한 우리 기록과 일본 측 기록에는 큰 차이가 있다. 「보통학교령」이 공포된 1906년 당시 우리는 공립소학교가 학제개편을 통해 공립보통학교로 전환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에 비해 일본 측 기록은 공립소학교에 대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고, 공립보통학교가 새롭게 개교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는 인천 뿐 아니라 전국의 공립보통학교의 역사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왜 그랬을까? 통감정치를 통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조선 근대화의 초석을 놓기 위해 시작한 우리 교육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훼손시키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1907년 5월 6일은 일본인들이 왜곡한 창영학교의 개교일이다. 창영학교의 역사는 공립인천보통학교가 아닌 1896년 1월 22일 우리나라 최초로 설립된 인천부 공립소학교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인천 초등교육 역사에서 지워진 교원 다섯 명과 15명의 부교원, 그리고 11년 동안 배출된 몇 명인지도 불분명한 졸업생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