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심호흡의 필요 / 오사다 히로시
- 채이현 / 자유기고가
너는 다른 누구도 되지 않았다. 좋든 싫든, 너라는 한 사람밖에 될 수 없었다. 그걸 알았을 때, 바로 그때였다. 그때 너는 이제, 한 명의 아이가 아니라, 한 명의 어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신포동에는 ‘포디움126’이라는 카페가 있다. 커피와 음료를 파는 동시에 인천과 관련된, 혹은 가게 분위기에 어울릴 만한 소품들을 파는 상점이다. 나는 그 곳에서 벚꽃 사진이 담긴 문진을 친구에게 선물한 적이 있다. 한참 벚꽃에 대한 기대가 만발한 때였다. 이 책 역시 그 곳에서 구매한 것이다. 처음에는 제목에 이끌렸는데 몇 장 읽고 보니 자꾸 머리에 맴도는 문장들이 있어 집에 돌아오는 길에 샀다.
시집을 사지 않은지 오래됐다. 대학생 때는 서점에 들어가 새로 나온 시집을 구경하고 그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뿌듯하게 집으로 데려오곤 했는데, 요즘은 시집 코너에 잘 가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시가 점점 난해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과정을 짧게 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점점 더 파편화된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물론 나, 개인의 생각이다. 어쨌든 시를 읽는 일이 피곤해졌다. 내가 왜 이걸 읽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면 “이번에도 시와 공명하는 것에 실패했군.”이라는 판단에 책을 덮는다.
단순히 시 읽기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작가 개인의 특수성이 작품을 빛나게 하겠지만 그 또한 어느 정도의 보편성 안에서만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최근에 내가 읽은 시집들은 작가 본인과 그걸 ‘해독’한 추천인을 제외하면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것들이었다. 한국의 시인들이 표현의 독창성에 집중하다 본질을 놓친 것은 아닌지, 통찰의 대상을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애정을 섞어 불만을 이야기해본다. 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쓰면 안 되는 것인지, 그것이 작품성을 떨어뜨린다고 느끼는 것은 아닌지 한 번 묻고 싶다.
이렇게 시에 대한 염증을 느끼고 있는 중 발견한 <심호흡의 필요>는 나에게 신선한 바람 같은 것이었다. “말을 심호흡한다. 혹은, 말로 심호흡한다. 그런 심호흡이 가만히 필요하다고 느꼈을 때, 멈춰서, 가만히, 필요한 만큼의 말을 글로 썼다.”는 작가의 말이 우선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은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다. 1부에서는 나는 언제 어른이 되었을까, ‘그때’는 언제였을까를 물으며 아홉 개의 글을 변주한다. 걷기의 즐거움을 잃었을 때, 더 이상 멀리가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을 때, ‘왜’라는 말을 꺼내지 않게 되었을 때 등 시인이 생각하는 ‘그때’는 다양하다. 2부에서는 살아가는 풍경 속에서 삶을 성찰한다. 나무, 꽃집, 도토리, 연하장 등 일상적인 소재들이다.
작가는 오사다 히로시라는 일본인으로 시인, 평론가, 아동문학가, 번역가, 수필가 등 다양한 방면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2015년 작고할 때까지 일상의 무심한 풍경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풀어낸 시와 에세이를 주로 썼다고 한다. 처음 접하는 작가였는데 다른 작품들이 보고 싶어질 정도로 보편적인 감정을 차분하게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글이 쉽다.
이 책을 가게에서 들고 나오면서 푸른 잔디밭과 나무 그늘 아래에서 읽으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다. 적절한 바람과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 깊게 심호흡하는 나를 상상했다. 개인적인 일들로 매우 바쁘고, 어른이 되었다는 이유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선택지가 너무나 많은 요즘이었다. 나에게 ‘심호흡’이 필요한 때였나 보다.
누구나 쉽게 시를 읽고, 쉽게 쓸 수 있는 문화적 토대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글쓰기의 성역이 무너지고 있다. 물론 이것이 늘 좋은 방향으로만 작용하지는 않는다. 대중이 좋은 글을 찾아 읽기 어려운 환경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양적인 변화가 질적인 변화로 이어진다고 하지 않는가. 그것을 기대해본다. 조금 더 쉬운 글이, 조금 더 보편적인 통찰이, 조금 더 특별한 감성을 표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어린이들의 글이 반짝이는 이유처럼 말이다. 어쩌면 이 시인이 말한 것처럼 어른이 되어버린 ‘그때’ 우리가 잃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어떠한 것들을 찾아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