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인 합창, 세계무대를 점령한 인천시립합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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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인 합창, 세계무대를 점령한 인천시립합창단
  • 송현민
  • 승인 2023.06.14 11: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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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문화 40년을 듣는다]
(8) 한국합창의 대부 윤학원 - 합창문화의 새 역사를 이끌다(상)
/송현민 『월간 객석』 편집장(음악평론가) 대담·집필
 인천문화재단이 오는 2024년까지 인천문화예술 40년사(1981~2021)를 편찬한다. 이에 인천in은 인천문화재단과 함께 인천문화 40년을 이야기하고 증언해줄 인물 12인을 선정, 구술 작업을 진행하고 그 내용을 2023년 7월까지 차례로 연재한다. 여덟번째 순서는 윤학원 지휘자(전 인천시립합창단 예술감독)로 송현민 『월간 객석』 편집장이 만났다.

 

윤학원 지휘자. 5월 1일 서울 강서구 코러스센터에서 인터뷰했다.(ⓒ유광식)

 

1995년부터 2014년은 인천시립합창단뿐만 아니라 한국 합창계의 전성기였다. 인천시립합창단은 윤학원과 함께 늘 선봉에서 한국 합창문화의 발전을 이끌었다. 새로운 합창곡을 꾸준히 내놓았고, 좋은 연주로 새 곡을 한국합창 역사에 안착시켰다. 노래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물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도 선보였다. 그 결과 합창 공연의 틀을 파괴했으며, 새로운 공연 형태의 틀을 짓기도 했다. 합창이 뮤지컬과 음악극의 옷을 입는가 하면, 대중가요도 합창의 소리를 통해 다시 태어나기도 했다. 인천시립합창단의 새로운 시도는 전국 시립합창단들의 롤모델이 되었으며, 한국 합창계의 이정표와 지도가 되었다. 이처럼 ‘인천’은 한국 합창문화의 중심지로 군림했다. 모든 것을 이끈 소리의 디자이너는 윤학원이었다.

윤학원은 인천시립합창단(1995~2014)뿐만 아니라 여러 합창단의 지휘자를 역임했다. 인천문화원어린이합창단(1962~1967), 극동방송소년소녀합창단(1965~1968), 한국마드리갈합창단(1969~1983), 선명회어린이합창단(1970~2003), 대우합창단(1983~1988), 서울레이디스싱어즈(1989~2000) 등이다. 그가 지나온 길은 한국 합창의 현대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작곡을 전공했던 전력 덕분에 창작에도 관심을 보여 여러 작곡가들을 통해 수많은 합창곡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탄생한 합창곡들은 오늘날 한국합창사에 중요한 작품들로 자리 잡았다. 중앙대학교 교수로도 재직(1979~2004)하면서 여러 합창단원과 합창지휘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2014년 인천시립합창단 퇴임 기념 공연(인천문화예술회관)과 윤학원
2014년 인천시립합창단 퇴임 기념 공연(인천문화예술회관)과 윤학원

 

윤학원(85)은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그는 윤학원코랄의 단장을 맡고 있다. 윤학원코랄의 사무실이 위치한 서울 강서구. 건물 전체가 합창을 위한 베이스캠프로, 목소리의 공유와 합창의 미래를 위한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윤학원 단장을 만나 인천문화 40년(1981~2021)의 사료와 자료가 될만한 이야기와 추억을 묻고 들었다.

 

노래를 잘 부르던 인천 소년

윤학원은 1938년 황해도 옹진 온천리(현 인천시 옹진군)에서 태어나, 열한 살 때인 1949년 인천 인현동으로 이사했다. 그러던 중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나룻배를 타고 영종도에 피란 갔고 1951년 부산으로 향하는 피난 배에 올랐다. 하지만 충남 웅천 근처 바닷가에서 배가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바람에 간신히 구조되었다. 웅천에서 살던 윤학원은 1953년 휴전이 되자 다시 인천 인현동으로 올라왔다. 웅천읍의 작은 교회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인천에서든 윤학원은 노래를 잘하는 소년이었다.

 

- 인천 영화중학교(현 대건고등학교 전신)에서 만난 백석두 선생을 회고해주세요.

“아버지는 기독교 학교를 가야한다면서 저를 영화중학교에 입학시키셨습니다. 그곳에서 백석두 선생을 만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미남이셨고 노래도 잘 하셨어요.”

- 말씀을 들어보니 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약 서른 살 터울의 형님(윤학수)은 목회자셨습니다. 아코디언 연주를 잘 하셨어요. 어린 시절에 자연스레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어요. 새벽 예배에서 풍금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요.”

- 영화중학교 시절에 특별히 기억나는 추억이 있나요?

“당시 학교 건물이 인천 만석동에 있었는데요. 영국인들이 주둔하다가 나간 건물을 학교로 쓰고 있었어요. 밤에 학생들이 보초를 섰던 기억이 납니다.”

- 음악 시간이 있었나요?

“그럼요. 미술 시간도 있었죠. 음악 시간이 되면 백석두 선생이 수업 때 학생들에게 노래를 다 시키셨어요.”

 

- 음악을 공부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나요?

“수업 시간에 노래를 불렀는데, 썩 잘 했나봐요. 그래서 백석두 선생께서 성악 공부를 제대로 해보라고 권하셨어요.”

- 어떤 노래를 배웠나요?

“이탈리아 가곡 ‘카로 미오 벤(Caro Mio Ben)’ 등을 배웠습니다. 2학년 때 인천 애관극장에서 열린 경연대회에서도 나갔습니다. 그런데 무대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어요. 변성기가 찾아온 것이었죠. 한 마디도 불러보지 못하고 내려와야 해서 집으로 가는 길에 울면서 갔습니다.”

- 함께 음악을 공부하던 친구도 있었나요?

“초등학교 때 임종빈이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웅진으로 피난 갔을 적에 만난 친구였는데요. 그도 노래를 잘해서 경연대회에 늘 같이 나가곤 했어요. 그가 1등을, 저는 2등을 하곤 했죠.”

 

윤학원은 중학 시절에 인천 내리교회를 다녔다. 부친은 내리교회의 장로였다. 윤학원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작곡을 공부했다. 당시 작곡을 가르쳤던 전주온은 인천사범학교(현 경인교육대학교)에 재직했는데, 윤학원이 다니던 내리교회 성가대원으로 활동했다. 교회는 당시 서양음악과 전공자들이 활동하던 또 하나의 장이었다. 교회를 통해 서양음악이 국내 유입되기도 했다. 특히 1954년, 그러니까 윤학원이 중학생이던 시절에 내리교회는 우리나라 최초로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전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윤학원은 이러한 영향 속에서 음악과 보다 가까워질 수 있었다.

 

1954년 12월 22일과 23일, 한국 최초로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전곡을 연주한 후 내리교회 성가대 모습(내리교회 제공)
‘메시아’ 공연에 사용된 악보. 6개월에 걸쳐 등사 원지에 철필로 일일이 그려 등사기로 인쇄했다(내리교회 제공)

 

- 당시 교회에서는 어떤 음악(찬송가)을 불렀고, 가끔 음악회도 열렸는지 궁금합니다.

“내리교회의 성가대가 노래를 참 잘했어요. 40~50명 정도였는데요. 합창을 참 많이 했어요.”

 

5월 1일, 코러스센터에서 윤학원 지휘자와 송현민 편집장.

 

인천공업고등학교 입학과 작곡 공부

1954년 윤학원은 인천공업고등학교(현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인천공고는 1940년에 개교했으며, 1946년에 관악부가 창설되었다. 관악부는 당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관악부 동문이 모여 1987년 인천시민회관에서 첫 동문음악회를 갖기도 했다. 윤학원은 2018년 제18회 동문음악회에서 특별 객원지휘를 맡기도 했다.

 

인천공고 관악부에 입단한 윤학원
인천공고 관악부에 입단한 윤학원
인천공고 관악부. 교련복을 입고 있다
인천공고 관악부. 교련복을 입고 있다

 

- 1952년 인천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한 뒤에 관악부(밴드부)에 입단했습니다.

“음악에 매진하는 제 모습이 탐탁지 않으셨던 아버지의 권유로 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좋아하는 음악을 못 하게 될 줄 알았어요. 인천공고는 음악 수업은 없었지만, 다행히 관악부(밴드부)가 있어 입학하자마자 가입하여 테너 색소폰을 맡았습니다. 당시 인천공고는 관악부로 꽤 유명했어요. ”

- 당시 관악부 학생들은 악기나 레슨을 어떻게 받았나요?

“학생들이 30명 정도 되었는데요. 졸업 후 군악대에 입대한 선배들이 가끔 찾아와서 지도하곤 했어요.”

 

어릴 적부터 곧잘 하던 노래에 대한 미련은 여전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고심 끝에 작곡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윤학원은 훗날 ‘그리운 금강산’(1962)의 작곡가로 알려지는 최영섭(1929~)에게 수업을 받기 시작한다. 1955년, 고교 1학년 때였다. 최영섭은 인천중학교 재학 중 서울 경복중학교로 편입하여 임동혁(1912~미정) 문하에서 작곡을 배웠고, 중학교 재학 중이던 1947년에 첫 작곡발표회를 갖기도 했다.

서양음악에서 작곡은 곡을 짓는 선율학은 물론 화음을 넣는 화성학, 악보에 새겨진 음표를 노래로 불러야 하는 시창, 음악을 듣고 악보에 옮기고 분석하는 청음 등의 능력과 수업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일반적인 악기 공부보다도 더욱 복합적이다.

 

- 작곡 수업은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당시 최영섭 선생이 인천에 거주해서 화성학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분의 모든 것을 닮고자 걷는 모습까지 흉내 내며 걷기도 했습니다. 한편 인천사범학교의 전주온 선생이 화성학을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있어서 그분께 가르침을 받기도 했습니다. 우리 집이 피혁점을 했는데, 선생들에게 구두 뒷굽 같은 것을 수업료로 내신 드리기도 했어요.(웃음)”

 

서울의 작곡학도, 인천의 젊은 합창지휘자

 

- 1957년 연세대학교 진학합니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진학 정보가 많지 않았을 때였는데요. 대학 안에 음악과나 음악대학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당시 인천 율목교회 고등부에 다녔는데, 성가대 지휘자를 전석환 선생이 맡고 계셨어요. YMCA(기독교청년회)에서 ‘싱어롱 Y’ 리더를 하던 유명한 분이었어요. 당시 ‘건전 노래 부르기 운동’을 이끌었던 분인데, 연세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1935년생인 전석환은 1955년 인천고를, 1959년 연세대 작곡과를 졸업했다) 그래서 저만 보면 ‘윤 군은 꼭 연세대를 가야 해’라면서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연세대에 작곡 전공으로 진학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 당시의 작곡 공부도 지금처럼 화성학, 선율학, 시창, 청음 등 여러 과목을 공부해야 했나요?

“그럼요. 시창 공부도 해야 했는데 배울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같은 교회(율목교회)에 다니고 있던 사범학교의 정응실이라는 여학생에게 어느 날 용기를 내어 가르쳐달라고 사정했어요. 그래서 매일 새벽기도회가 끝나면 한 시간씩 시창을 배웠습니다.”

- 그때 어떤 교재를 사용했었나요?

“‘코르위붕겐’이라는 두꺼운 책이었어요. 연세대 입시장에서 교수가 서너 곡을 무작위로 펼쳐서 불러보라고 했고, 어디를 펼치든 자신 있게 척척 불렀습니다.”

 

윤학원은 종교음악과 3회 졸업생이다. 1957년 윤학원이 입학한 종교음악과는 연세대 신학대학에 있었다. 당시 대학생은 일종의 준전문가였다. 그 역시 나운영 교수 문하에서 작곡을 배우는 음악학도였지만 한편으로 가곡 작곡 발표회를 여는 등 작곡가로서의 사회 활동도 부지런히 했다. 인천에서 기차로 통학하며 다녔던 윤학원은 주말이면 인천 율목교회 고등부 성가대와 인천기독학생연합에서 지휘를 하기도 했다.

 

- 대학교 4학년 때 아이들을 모아 인천에 합창단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초등학생 15명 정도를 모아 만든 작은 합창단이었어요. 아이들의 열의가 커지면서 무대 경험도 만들어주고 싶어 신신예식장에서 공연을 갖기도 했습니다.(신신예식장은 애관극장 뒤 언덕에 있었다. 지금은 신신컨벤션웨딩홀로 바뀌었다) 전국적으로 합창단이 만들어지고 지휘자가 필요했던 시대였어요. 그래서였는지 연주회가 끝난 후 인천문화원이 지원하여 인천문화원어린이합창단으로 격상되기도 했습니다.(인천문화원은 1957년 6월 한미문화관이 개칭한 것이다. 1954년 한미문화관은 미공보원과 인천시 합동으로 한미친선과 시민 계몽을 앞세우며 문을 열었고, 영화 상영 같은 것을 했다)”

 

윤학원이 지휘한 인천문화원어린이합창단(1962~1967)
윤학원이 지휘한 인천문화원어린이합창단(1962~1967)

 

음악교사와 방송국 피디 시절

 

- 연세대 졸업(1963) 후 동인천중·고등학교에 음악 교사로 부임했습니다.

“인성여자고등학교에 강사 자리가 났지만, 총각이라는 이유로 얼마 안 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지내던 중 동인천중·고등학교 음악 교사로 채용되었습니다. 당시 한 반이 60명쯤 되었는데, 그중 40명을 선발하여 합창단을 만들었습니다. 전국 합창대회에 나가 1등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악기처럼 특별한 기법을 배우지 않고 목소리만으로도 음악활동을 할 수 있는 합창은 그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음악 장르이다. 윤학원이 활동하던 1960년대에 인천에도 여러 합창단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호산나합창단(1958), 대한어머니회합창단(1966), 샤론합창단(1968), 인천남성합창단(1970), 한국부인회합창단(1971), 인천YMCA 합창단(1974), 로고스합창단(1976), 인천장로성가단(1977), 인천여성합창단(1977) 등이다.(괄호 속 연도는 창단연도)

그러던 중 윤학원의 활동에 작은 변화가 왔다. 음악 교사를 관두고 극동방송 피디를 맡게 된 것이었다. 극동방송은 현재 서울시 마포구에 있지만, 당시 방송국은 인천에 있었다. 1956년 12월 23일에 인천 남구(당시 경기도 인천시, 현 미추홀구) 학익동에서 첫 전파를 발사했던 극동방송은 1961년에 인천 중구 북성동으로 사옥을 옮겼고, 1967년 지금의 마포구 사옥으로 이전했다. 사옥을 이전하면서 윤학원도 자연스레 거주지와 활동 반경을 서울로 옮기게 되었다.

 

극동방송 피디 시절
극동방송 피디 시절
인천 자유공원 인근에 위치했던 극동방송 사옥
가족과 함께. 그의 아들 윤의중은 현재 국립합창단 단장이다

 

- 음악교사를 관두고 극동방송으로 옮기게 된 동기가 있었습니까?

“어느 날 극동방송의 나진주 선교사가 음악방송 피디를 제안해왔어요. 당시 인천에서 합창 지휘를 잘 한다는 소문이 나서 극동방송 합창단도 맡고 있던 때였죠. 피디는 작가와 아나운서, 엔지니어까지 도맡아야 했는데, 교사 월급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그 자리가 탐났던 이유는 방송국에 쌓여 있는 수천 장의 클래식 음악 LP 때문이었습니다.”

- 극동방송에서의 업무와 생활은 어떠했나요?

“어떤 곡을 틀지 선정하고, 해설 대본을 쓰기 위해 밤새워 공부하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듣고 싶은 음악이 있으면 나진주 선교사에게 부탁하면 미국에 주문해서 가져다 주어서 합창 대가들이 지휘하는 LP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인천 자유공원 언덕에 위치한 방송국은 붉은색 기와지붕의 아담한 단층 양옥이었습니다. 방송을 하기 위해 내 자리에 앉으면 넓은 창으로 바다가 드넓게 내다보였습니다.”

 

인천시립합창단과 함께

1967년, 윤학원이 재직하던 극동방송이 서울 마포구로 사옥을 옮기면서 윤학원의 활동지도 자연스레 서울이 되었다. 1963년부터 1968년까지 극동방송 소년소녀합창단 지휘자를 맡았던 그는 한국마드리갈합창단(1969~1983), 선명회어린이합창단(1970~2003), 대우합창단(1983~1988) 등의 지휘자를 맡는다. 선명회합창단을 지휘할 때는 인천문화원어린이합창단(1962~1967)의 경력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 선명회합창단 시절이던 1973년에는 4개월 동안 세계 96개 도시를 돌며 100회 이상의 순회 연주를, 1974년에는 4개월의 미국 순회 공연을 이끌기도 했다. 그러던 중 인천시립합창단을 맡으며 인천의 음악계로 돌아왔다.

인천시립합창단은 1981년 창단되었다. 창단을 이끈 윤영진(1942~)은 경희대 작곡과 졸업한 뒤 인천남성합창단(1970), YMCA 합창단(1974), 인천장로성가단(1977), 인천합창단(1979) 등이 창단되는 데 산파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초대 상임지휘자로 1982년까지 재임했고, 이후 이경구(1983~1986), 윤영진(재임 1986~1992), 최훈차(1992~1994), 최홍민(1994~1995)를 거쳐 윤학원(1995~2014)이 상임지휘자직을 맡게 되었다. 인천시립합창단은 지금은 없어진 인천시민회관에서 정기연주회를 가졌는데, 1994년 개관한 인천문화예술회관으로 터전을 옮겼다.

1982년 인천시립합창단 창단 공연(인천시민회관)
1982년 인천시립합창단 창단 공연(인천시민회관)

 

- 어떤 계기로 인천시립합창단을 맡게 되었나요?

“인천문화예술회관 관장이 직원과 함께 집으로 찾아와 인천시립합창단의 지휘를 맡아달라고 하더군요.”

- 인천시립합창단을 맡을 당시, 1990년대 음악계나 합창계에서 가장 기억이 되는 사건이나 역사적인 공연이 있었나요?

“서울에서 한국마드리갈합창단 지휘 활동을 열심히 하던 때여서 인천 음악계 사정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인천시립합창단은 지휘자와 단원들 간에 갈등이 많아 해체된 상태(1995년 4월)였습니다. 얼마나 심했으면 무대에서 단원들이 노래하지 않는 것으로 지휘자에게 무언의 시위를 했을 정도였죠. 지휘자도 합창단도 모두 없어진 그런 곳에 새롭게 합창단을 꾸려 지휘를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 인천시립합창단은 1995년 4월 해체 후 6개월 공백기를 거친 후 11월에 재창단되었습니다. 새 정비를 위해 어떤 계획을 세웠나요?

“일단 전임 작곡가를 임명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세계적인 합창단이 되기 위해선 외국 노래를 가지고는 세계무대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그래서 오종찬 작곡가에게 한국적인 합창을 만들 것을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25명의 신임 단원들을 선발했습니다.”

- 취임 후 첫 공연은 무엇이었나요?

“오랜 고민 끝에 <인천 MASS>로 정했습니다. 원칙적으로 시립합창단이 종교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는데요. 감사하게도 나의 이런 결정에 불평하는 단원들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오디션을 통해 선발한 단원들이 신기하게도 모두 크리스천이었습니다.”

 

1996년 4월 19일 인천문화예술회관과 5월 11일 서울예술의전당에서 제54회 정기연주회를 재창단 공연으로 선보였다. 이후 윤학원과 인천시립합창단은 승승장구했다. 벨기에 세계합창연합회(IFCM) 창립 기념 공연에 정식초청을 받아 유럽행 비행기에 올랐고, 이어서 프랑스, 오스트리아에서도 순회공연을 선보이며 호평을 받았다.

 

화려한 무대 연출이 돋보이는 인천시립합창단 공연
화려한 무대 연출이 돋보이는 인천시립합창단 공연

 

- 1996년 재창단 후 1997년에 벨기에에서 열린 세계합창연합회(IFCM) 창립 15주년 기념 연주 같은 자리는 어떻게 초청 받았나요?

“10여년 전인 1987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제가 지휘한 대우합창단의 무대를 보고, 또 캐나다 밴쿠버에서 서울레이디스싱어즈의 연주를 본 세계합창연주회 사무총장 장 글로드(Jean Claude)가 저에게 초청 편지를 보냈습니다. 대우합창단과 서울레이디스싱어즈를 지휘한 제가 현재 맡고 있는 인천시립합창단도 훌륭하리라는 생각에서 초청장을 보냈다고 하더군요.”

- 벨기에 공연이 창단 이후 첫 해외 공연이었는데요. 현지 반응은 어떠했나요?

“벨기에 나뮈르에서 연주회(7월 8~12일)를 가진 다음 13~20일에 프랑스에서 순회 연주를, 20~21일은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열린 유로파 칸타트(Europa Cantat)의 초청을 받아 공연을 가졌습니다. 특히 유로파 칸타트에는 3천여 명의 지휘자와 합창단원들이 관객석에 있었는데, 공연 후 세 번의 기립 박수를 받았고, 공연 실황이 ZDF(독일어권 3개국인 독일·오스트리아·스위스의 공영방송이 합작한 문화 정보 채널)을 통해 방영되기도 했습니다.”

 

→ 윤학원과 인천시립합창단 활약은 하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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