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지지 못했던 '인천적인' 미술... 연안부두를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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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지 못했던 '인천적인' 미술... 연안부두를 찾다
  • 이경모
  • 승인 2023.07.07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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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문화 40년을 듣는다]
(9) 이철명 화백 - 인천 미술의 뿌리, 산 증인이 되다(하)
/ 이경모 미술평론가 대담·집필
인천문화재단이 오는 2024년까지 인천문화예술 40년사(1981~2021)를 편찬한다. 이에 인천in은 인천문화재단과 함께 인천문화 40년을 이야기하고 증언해줄 인물 12인을 선정, 구술 작업을 진행하고 그 내용을 2023년 7월까지 차례로 연재한다. 아홉번째 순서는 이철명 화백(전 경기예총 회장)이다. 이경모 미술평론가 만났다. 하편을 싣는다.

 

이철명 화백 ⓒ유광식

 

이경모; 교사 생활도 좀 하시지 않으셨어요?

이철명 ; 제가 선인중학교 미술 선생으로 좀 있었어요. 그러다가 인천공전으로 갔어요. 인천공전 교수 그만둔 게 조금 내가 잘못한 거예요. 거기 꼭 있어야 하는 건데 어리석어서... 왜냐하면 미술협회 일이라고 하면 제가 좋아서, 돈 안 생겨도 그냥 그 일이 좋아서 거기에 몰두하느라 교수직을 그만뒀죠. 애들 가르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으니까요.

 

이경모 ; 그래도 그때 제자들이 있을 것 같은데요.

이철명 ; 지금 유정복 시장님, 선인중학교 1학년 때 미술시간 제가 지도했어요. 그때 같이 배운 애들이 이근식 하고 저기 김진한 하고 다 같은 학년이었어요. 미술 쪽으로는 선인중학교에서 이근식하고 김진한을 배출했죠. 중학교 교사할 때 미술부 애들을 데리고 이화여고 앞에 서울예술고등학교에 갔어요. 그래서 그 학교 구경시키고 복도에 그림 걸린 거 다 보여주고 했지요. 박영성이가 그때 서울예술고 강사로 나올 때인데 이 학교 들어오라 그래요, 그래서 합격해서 선인중학교 미술부 아이들이 서울예고를 많이 나왔어요.

걔네 둘이 집안 형편은 안 좋았어요. 제가 이근식 아버지, 어머니하고도 잘 알고 지냈고, 그리고 김진한이 아버지 어머니하고도 잘 지냈어요. 김진한은 학교는 잘 갔는데 여기서 통학을 했거든요. 이게 좀 집이 좀 가난했어요. 그래서 제대로 먹고 학교 다녔다고 보지는 않아요. 새벽에 가야 하니까 서울로. 김진한은 경희대학교 다녔고 근식이는 놀고 있다가 인천대학교로 갔죠.

 

이경모 ; 박영성 교수님하고 앙데팡당전 만들지 않았어요?

이철명; 앙데팡당전이 1959년 시작해서 5회를 했어요. 앙데팡당전은 59년, 60년도 2년을 제가 담당했어요. 그 다음에는 제가 관계를 안 했어요. 그때 61년도가 결혼할 때고, 그리고 63년도에는 나이 들어가지고 군대 끌려갔어요. 그때는 경찰서에서 기피자들이라 해가지고 붙들어 가고 했어요. 군대를 가는 바람에 앙데팡당전에 관계할 수가 없었지요. 그 전에 인천미술협회가 1952년 2월 19일이 사실은 창립일이에요. 그런데 그거 제대로 집행부에서 써먹는 사람 하나도 없어요.

 

이경모 ; 그때는 6.25 전쟁 중이었는데 창립했네요. 61년이 아니라 52년도란 말씀이지요?

이철명 ; 이경성, 우문국, 김영건, 최석재, 이무용, 이분들 다 일본에서 공부한 분들이에요. 최석재 김영건 이분들이 미협에서 처음에 시작할 때에 김찬희, 아까 그 사람도 미술선생이었잖아요. 그때 시작했어요, 이북에서 피난 나온 사람이 있었고 한 열두세명이 시작했어요. 그밖에 박세림, 장인식, 유희강이 꼈죠. 그런데 박영성이는 처음에는 있긴 있었는데 먹고 살기 위해서 좀 이렇게 왔다 갔다 했어요.

 

이경모 ; 앙데팡당이란 명칭도 박영성 선생님이 제안했다는데...

이철명 ; 박영성과의 관계가 앙데팡당전 때문에 맺어진 것인데, 박영성, 황추, 나 셋이서 운영한 거예요. 여기에 장선백이를 나중에 가입시키죠. 이 사람 좋은 미대생이요. 그리고 자존심 강한 독불장군이었죠.

황추, 박영성이 날 아주 잘 써먹었어요. 자기네 학교에 가서 강의하고 월급 받고 나는 맨날 미술협회 일만 보고, 그런 일만 하는데 월급 하나도 없고, 그러니까 내가 뭐가 됐겠어요. 그림도 제대로 못 그리고 협회 일만 했어요. 그래서 한 번은 화가 나서 싸움 붙었어요. 생각을 해보라고 당신 애들은 학교에 가서 강의하고 난 밤낮 미술협회에서 일이나 보고, 그림 갖다 걸고 저기 전시장 지키기 하고, 당신들은 학교에 있다가 저녁 다섯시 넘어야 오고 짜증이 났지요.

저 아니 가서 교사시험 치는데 나 빼놓고 당신들 둘이만 가. 내가 반말로 아니 박선생, 황추하고 나 빼놓고 선생 되겠다고 선생 시험 치러 가고, 나보고 가자고 하면 얼마나 좋으냐고... 자기네들이 볼 때는 아직도 미달이라고 생각을 했는지... 일은 내가 다 하고 자기네들은 저렇게 나와서 폼잡고 그래서 내가 다시는 안 한다고 했다가도, 또 오면 할 사람 없으니까 또 내가 하고... 그래서 인생 스스로 실패를 했다고 그래요.

 

이경모 ; 그 후에도 미술협회 일을 많이 하셨잖아요.

이철명; 경기미협 지부장 했죠. 경기예총 회장 4~5년 했고, 인천미술협회 회장 두 번하고, 부회장은 다섯 번인가, 총무까지 합하면 일곱 번인가 했어요.

 

이철명 화백과 이경모 미술평론가 ⓒ유광식

 

이경모 ;인천미술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 주시죠.

이철명 ; 인하대 풍토가 다들 자기네들 끈으로 교수를 끌어들였기 때문에, 또 인천대학교는 또 강광의 파워가 세가지고 그의 스타일로 이렇게 내려왔다고요. 일단은 실제로 거기 교수들이 인천적인 사람이 없어요. 인하대도 마찬가지예요. 인천적인 게 없어. 박영성이 있을 때 아마 외로웠을지 몰라요.

 

이경모 ; 어릴 때라 잘 모르겠지만 외로워 하셨을 거 같아요. 몇일 전에 백현옥 교수님 마석 작업장에 갔더니 당신도 왕따였다고 말씀하시던데요.

이철명 ;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소위 뿌리 때문에 인천의 미술 풍토가 과연 바람직하게 발전할 수 있을까 하는 거예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좀 더 세야 하는데... “그런 걸 뭘 따져 내버려둬” 하니, 그래서 발전이 안 돼요. 이게 참 인천에 아주 말 못할 병폐예요.

 

이경모 ; 혹시 후배들 중에 칭찬해주실 분 있다면?

이철명 ; 처음 이런 말 하지만 김재열이 잘하는 건 내가 칭찬해요. 일제시대 사진 가지고 다시 수채화로 재생을 시켜놨거든요. 이번에는 청관을 많이 넣어서 재생을 시켜놨어요. 그런 사람이라도 있으니까는 옛날을 다시 회상할 수 있고, 상상할 수가 있고 그 형태를 이렇게 그림으로나마 우리가 바라볼 수가 있다고요.

그래서 회화가 수채화가 옛날 우리나라 역사적인 도시 환경을 다시 리바이벌 해서 재생시켜놓은 건 내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그림 때문에 인천의 은폐된 혹은 숨은 역사를 상상할 수가 있어요. 회화적인 면보다도 하나의 역사적인 사실을 가지고 재구성, 재편성 재생을 했으니까 그걸 내가 칭찬하는 거예요.

 

이경모 ; 작가로서 인생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무엇일까요?

이철명 ; 저에게 대한 거라면 실패작이라고 그래요. 네 실패작. 정말이에요 사람 노릇을 못해서 그래. 요새 어떻게 생각을 하는 가하니 내가 그동안에 너무나 실패작만 가지고 씨름했는데...

 

이경모 ; 제가 보기엔 참 잘 해오셨어요. 선생님을 존경하는 후배들이 많아요. 향후 계획을 여쭤볼게요. 작업에 관한 것도 좋고...

이철명; 혼자서 그림 그리는 공간이 필요해요. 살림 집 사람하고 이렇게 연관이 되면 안 되겠다. 혼자 죽더라도, 빨리 내가 좀 방 하나가 내 앞으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난 요새 그거를 바라요. 조그만 방이라도 이 집에서도 나가라고 하거든요. 올해 2년 넘었거든요. 그래서 나갈게요 했어요. 근데 제가 여기 나가면 사실 갈 데가 없어요. 그래서 연안부두에 얻으려고 해요. 이 연안부두를 보니까요, 아침 점심 저녁 그런 거 따지 말고, 만조 같으면 좋을 것 같으면서도 안 좋고, 간조로 갔을 적에도 물이 없으니까는 보기가 흉하고... 내가 보는게 문제가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변한 다는 게 중요해요.

그래서 그 풍경은 시각각으로 변하기 때문에 어떤 게 좋다 이렇게 말하기가 어렵다는 거예요.

물이 많이 만조가 됐을 때는 너무 많아서 곤란하고, 물이 없을 때는 너무 없어서 건조해 보여서 안 좋고, 물에 중간적으로 있는 게 제일 무난한데, 그렇게 쉽게 구도가 잡히지 않아요. 그래서 거기는 언제 좋은게 닥칠지 몰라. 그래서 거기서 내가 아예 살으려고 해요. 전국에서 연안부두 잘 그리는 사람이 없어요. 부산도 많을 것 같은데도 없어요. 인천에서 저 혼자 외롭게 하고 있죠.

 

이철명 화백의 조그만 화실. 여기서도 나가야 한다.

 

이경모 ;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사생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이철명 ; 응, 제일 구도가 좋을 때가 언제냐, 그건 몰라요. 그래서 제가 요새 카메라 한 대 구했어요. 아주 싸구려 카메라 일제인데 중국에서 만든 거예요. 일제인데 중국 OEM이죠. 그거 새거 살려고 했다가 놓쳤어요. 한 달 있다가 가는 바람에 다 팔려서 3년된 헌 걸 샀어요. 65만 원.

 

이경모 ; 좋은 카메라를 사셨네요.

이철명 ; 근데 제가 그 카메라를 왜 샀는가 하니, 손에 딱 잡혀요. 조그마 하니까. 큰 거는 이게 나와가지고 들고 다니기가 좀 거북해요. 항상 여기다가 갖고 다니려고 줄 달아서 가슴에 갖고 다니려고 이런 카메라 하나 샀어요. 왜냐하면 제가 아까 얘기했잖아요. 언제가 제일 좋으냐 때가 몰라. 아주 이렇게 권총처럼 넣기도 좋고. 그래서 약간 헌 것이지만 사진관에서 그걸 끼워줬어요. 그래서 앞으로 좋은 구도가 나올 거예요.

그리고 아주 무슨 서양에서 석양에 나온 그런 풍경 말고 아침도 아니고 저녁도 아니고 아주

그 애매한 시간에 아주 묘한 뉘앙스가 나오듯이... 그거를 제가 봤어요. 그걸 찾아야겠다 했지요. 그러려면 거기서 살아야만 좀 발견하지. 왔다 갔다 해가면서

 

제3회 한중일 수채화교류전_1983_리플릿 표지(좌)
제3회 한중일 수채화교류전_1983_리플릿 표지(좌)와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개관 초대전_1994 도록 표지

 

 

이경모 ; 선생님 작업에 관통하는 주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철명 ; 내가 아까 김상유 선생과의 관계, 또 김찬희 선생과의 관계라든지 그리고 자연히 그림 그리게 된 동기를 자꾸 생각해봐요. 바다 쪽으로 많이 치중을 하니까 자연이 맑고 푸른색을 좋아하게 되고 인천에 살다보니 자연이 물과의 관계에 있는 색채를 갖게 된 거 아닌가 이렇게 봐야겠죠. 그러다보니 저기 연안부두 배들이 주제가 되고 바다가 주제가 되고, 그리고 움직이는 것 소위 동적인 것이 또한 주류가 되지 않나 이렇게 봐야겠죠. 청관문화와 연안부두 문화, 이게 상당히 컸기 때문에 자연적인 현상이 아닌가 싶어요.

 

이경모 ; 선생님 혹시 후배들한테 하실 말씀이 없으실까요?

이철명 ; 이거 참 제가 시건방지게 말하는 게 될 것 같아서 겁나요. 제가 부족해서 말을 삼가해야 하는데 인천이 부족한 게 많아요. 부산이나 대구 광주에 비해서는 인천 미술인들의 자질이, 자세가 썩 이렇게 바람직하지 못해서 어려워요. 그리고 미안하지만은 아직 미술관이 없어서 인천이 미술관 없는 도시라는 것이, 뭐라고 할까, 좀 미술인으로서 프라이드가 있거나 인천이 작품 잘하는 곳이다, 그런 자부심이 없어요.

작고 작가들의 작품들이 살아서 진열이 돼 있으면 인천적인 긍지와 자부심, 희망적으로 그리고 표본으로, 목적으로 바라볼 텐데. 미술관이 없다는 것 때문에 이 작품이 과연 좋은 작품들의 집합이 될 건가, 하는 거죠. 그렇게 되긴 되겠는데 지금 못 보고, 아직도 부족한 것 같고... 지금 뭐를 말하기가 좀 어려워요. 오히려 젊은이들은 더 나아지겠죠.

 

이경모 ;긴 시간 동안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철명 ; 네 누추한 곳을 두 번이나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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