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숭의동(장사래) 주인공원 일대 - 유광식/ 시각예술 작가
다행히도 비 오는 날을 피해 이사를 했다. 전날까지 걱정이 많았는데 옮기고 나니 화장실 다녀온 마음처럼 개운했다. 대신 고양이가 잠시 아파 애를 태우기는 했다. 시선을 밖으로 돌리니 물난리가 심하다. 오염수 문제 외에도 장맛비 피해가 의외로 컸다. 자연재해가 무섭긴 무섭구나 싶다. 요새는 인재도 많은 것 같아 씁쓸하다. 예상되는 피해를 미리 점검하는 수밖에 없다지만 늘 당하고 만다. 핵 오염수 해양 방류에 직면하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닐진대 왠지 나만 모르게 진행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방류 소식은 역사의 페이지에서 영원히 지워낼 수 없을 것이다. 이 눅눅한 기분을 지우지 못하고 주인공원을 찾았다.
주인공원은 미추홀구의 숭의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철로변의 다른 이름이다. 주인선은 주안역과 남인천역을 잇는 3.8㎞ 철로였다. 지난 1985년 폐선되고 2005년 근린공원화로 잠정 결정이 난 후 시민들의 산책 및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되었다. 공원을 찾은 날은 장마의 기세로 빗줄기가 오락가락했다. 구름 낀 하늘 아래로 용현시장 부근부터 제물포역까지 걸어 보았다. 좁은 철길이던 곳곳에 나무를 심고 의자를 놓고 생활체육 기구를 설치해 두었다. 인근 주택가 시민들의 더없이 중요한 해방구처럼 느껴진다. 부슬부슬 빗방울 탓인지 사뭇 신비로운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도 같았다. 이곳이 철로였음을 알리는 벽화가 중간중간 보였고,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나온 가족들과 놀이터의 아이들이 공원에 깊은 숨을 불어 넣고 있었다.
전성기 시절만큼은 아니더라도 철로 주변에는 옛 정취가 녹아있어 걷는 걸음마다 아득했다. 철로와 연관된 간판을 보면 반가웠고 기차 바퀴 소리에 몇십 년 방아를 찧던 어느 노부부의 방앗간은 고즈넉했다. 놀이터 이름이 ‘주인공원역’인 것을 보면 사라진 지 오래는 되었지만, 철로 위 빛나던 인생만은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 골목과 도로는 좁고 주민은 많아 보이는 구역이다. 인근 독정리(미추홀구청 맞은 편) 대규모 아파트 공사가 진행 중인데, 완공되면 이 구역의 주인이 뒤바뀔 것만도 같다. 최근 전세 사기 피해 사례가 많은 지역이기도 하고 주거 불안이 가중되는 상황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상념들이다.
인근에는 육각정 경로당이 있다. 팔각정은 많이 들어 봤지만, 공사비가 부족했는지 육각으로 만들어 놓았다. 현재의 경로당은 인근에 신축(2018.7.31. 이전) 이전되었고, 예전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커다란 은행나무가 자라는 주택가 안쪽에 1층은 활동공간으로 2층은 육각정으로 만든 구조인데 특이할 수밖에 없었다. 골목을 지나다 보면 비밀스럽고 고전적인 위용에 눈을 사로잡는 모습이다. 높은 지대에 있어 주변을 훤히 조망할 수 있어 탁 트인 전망을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오르지는 못했다. 예전에 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 사무실로 이용된 적이 있다.
좁은 길 따라 걷다 보니 어느 숲길을 거니는 마음으로 주름진 시대를 만나는 것 같다. 지나고 보면 기억뿐이라 현재라는 공간에서 잘 남겨두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주인선에 대한 기억은 한 사진작가의 작업에 고스란히 담길 수 있었다. 인천의 원로 사진작가이신 류재형 작가는 지난 2014년, 『기억을 깁다 3.8㎞』 (김상태 글, 류재형 사진)를 지어 놓았다. 흩어진 기억을 기울 수 있었으니 글과 사진이 어느 한 편으로는 따뜻한 스웨터나 다름없다. 작가는 2019년 《잊혀져가는 철길, 주인선을 가다》 전시로 다시 주인선의 이야기를 시민들과 나누었다. 겪어보지 않아도 조금은 상상할 수 있고 그 가치를 의미화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주심에 감사했었다.
제물포역 쪽으로 가면서는 편의 시설이 보다 많아진다. 광장도 나오고 공용 화장실도 있다. 그 끝에 작은 집 모음의 조형물 하나가 순간 움찔하게 만든다. 최근의 사회적 문제가 연상되었다. 자본의 전세 사기 놀이에 고스란히 당한 많은 피해자들을 구제하려는 노력을 이 사회가 외면하지 않았으면 했다. 이미 생을 달리한 이에게 명복을 빌어도 본다. 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 끊어진 것인지.
도로의 횡단보도 위로 사람들이 걷기 시작하자 끊어진 철로가 이어지는 착시가 일기도 한다. 어느 음악가는 철로를 ‘평행선’이라고 지칭해 곡을 지었다. 만나지 않지만 서로 떨어지지 않는 애틋함에 설레는 것이다. 그렇게 함께 길고 험준한 시간을 견뎌온 우리네 시대가 주인공원에 묻혀 있는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공원길은 휴식 공간만이 아니라 주민들의 통행로로 지금도 수없이 많은 사람과 짐 보따리를 수송하고 있다. 길은 그렇게 다져지고 삶이 두터워지며 지역의 표상이 되는 것 같다. 언뜻 남루한 삶이 길게 수 놓여 보였지만 분명 우리들의 환경이 나아질 거란 희망 아닌 빛을 꿈꾸는 걸음이 아니었나 싶어진다. 규모만 작았지! 대규모 중앙공원이 부럽지 않을 공원이었다. 비록 열차는 없지만 영차! 는 있다. 이사도 했으니 잘살아 보자고 재차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