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이은 은율탈춤 보유자 - 인천 탈춤의 역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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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이은 은율탈춤 보유자 - 인천 탈춤의 역사가 되다
  • 윤중강
  • 승인 2023.08.16 0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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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문화 40년을 듣는다]
(10) 차부회 은율탈춤보유자 - 탈춤의 명가를 이루다(상)
- 윤중강 국악평론가 대담·집필
인천문화재단이 오는 2024년까지 인천문화예술 40년사(1981~2021)를 편찬한다. 이에 인천in은 인천문화재단과 함께 인천문화 40년을 이야기하고 증언해줄 인물 12인을 선정, 구술 작업을 진행하고 그 내용을 차례로 연재한다. 열번째 순서는 차부회 전통예술인(은율탈춤보유자)이다. 윤중강 국악평론가 만났다.

 

차부회 은율탈춤보존회 부이사장
차부회 은율탈춤보존회 부이사장(사진 = 유광식 작가)

 

인천엔 국악의 명가가 있다. 3대에 걸쳐서 오직 탈춤을 위해서 살아온 집안이다. 대한민국에 크게 자랑해야 할 인천을 대표하는 탈춤명가이다. 누군가는 이런 질문을 할지 모르겠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전통예술 4~5대를 이어가는 집안이 있지 않은가?” 맞다. 이들보다 더 오래도록 전통예술을 잇는 집안이 있다. 그런데 ‘인천의 탈춤명가’는 좀 다르다. 어떻게 다를까?

은율탈춤 인간문화재 차부회(車富會·64). 그는 인천의 탈춤명인 양소운의 막내아들이다. 이 가족의 특출함은 무엇일까? 어머니에서 시작해서 자식들에게 이어지는 삼대가 모두 탈춤과 함께 살아 왔는데, 삼대에 걸쳐서 ‘그 시대가 요구하는 전통예술’을 만들고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차부회의 어머니 활동, 차부회의 활동, 차부회의 아들, 딸(차민욱, 차은선)의 활동이 다르다. 그들은 모두 ‘탈춤의 동시대성’을 생각하면서, 각각의 세대에 맞는 방식으로 활동을 했다는 점을 높이 사야 한다는 것이다.

 

1대의 뿌리, 2대의 줄기, 3대의 열매

차부회를 알기 위해서는 어머니인 인간문화재 양소운을 먼저 알아야 한다. 1대 양소운은 탈춤의 ‘강습과 보급’에 치중했다. 젊은이들에게 탈춤을 가르쳤다. 한국의 전통예술 가운데 특히 황해도 지역 민속예술의 특징과 매력을 알리려 했다.

양소운은 누구인가? 1924년 황해도 재령에서 3남매 중 막내로 출생했고, 1934년 장양선에게 춤을 배우기 시작한다. 3년간 장양선에게 배운 춤은 강령탈춤이었다. 이외에도 김진명· 양희천· 문창규· 임방실· 유종철에서 황해도 지역의 다양한 기예를 배웠다. 1935년 개성 독촉극장에서 병신춤으로 첫 무대를 가지면서, 양소운은 서서히 인기를 얻는다. 일제강점기 정신대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결혼을 서둘렀고, 1944년 차영운과 결혼했다. 1950년 대구로 피란, 거기서 국악과 무용을 지도했다. 이 때만해도 양소운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어머니는 1956년 대구에서 인천으로 이주하시고 정착했습니다. 당시 인천에 정착한 실향민들이 많았는데, 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해서지방의 탈춤(봉산탈춤)을 다시 시작하게 된것 이지요".

어머니 양소운은 1967년 국가무형문화재 봉산탈춤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로 지정을 받는다. 이후 양소운은 황해도지방의 다양한 기예를 남쪽에 알리고자 하는 생각이 커졌다. 1971년 국가무형문화재 강령탈춤 예능 보유자 지정되었으나, 1976년 강령탈춤 보유자를 사퇴한다. 그러면서 양소운은 해서지방(황해도) 특유의 전통예술을 두루 세상에 알리는 일에 선봉에 선다.

2대 차부회는 탈춤의 ‘계승과 발전’에 치중했다, 어머니의 작업을 이어 받아서 해서지방의 탈춤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어머니가 대학생의 강습에 치중했다면, 차부회는 아이들에게 탈춤을 가르치는 것에 큰 비중을 두었다.

차부회는 인천 태생이다. 축현초등학교, 대건중학교, 인천고등학교를 거쳐서, 유한공업전문대에 진학했다. 그는 여기서 전통문화연구회를 조직했다. 비록 대학동아리였지만, 탈춤에 대한 지식과 실력을 단단하게 갖추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학교에서 차부회는 ‘동아리에 미친 놈’으로 통했다. 그는 광운대학교 산업경영학과에 편입을 했지만, 탈춤에 대한 열정은 더욱더 불타올랐다.

탈춤의 제 3세대는, 바로 차부회의 아들과 딸이다. 차부회의 어머니는 처음 자신이 탈춤을 추는 것을 반대했지만, 차부회의 생각은 달랐다. 강요는 하지 않았지만, 자식들이 탈춤을 하길 바랐다. 탈춤의 인연으로 아내와도 한 가정을 이룬 것처럼, 아들과 딸도 일찍이 탈춤을 함께 했다. 탈춤을 시작했을 때 자신의 어머니가 매우 엄격한 스승으로 돌변했던 것처럼, 차부회도 탈춤을 가르치는 동안만큼은 아들딸에겐 누구보다도 엄격한 스승으로 돌변했다.

차부회를 아버지로 둔 아들과 딸은 역시 탈춤을 매우 잘 춘다. 그러나 이들은 탈춤을 그저 탈춤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것이 또한 문화콘텐츠가 되어서 상품가치를 갖게 될까 고민이 많다. 그들은 탈춤의 ‘활용과 확산’을 염두에 두면서, 탈춤에 기반을 둔 새로운 콘텐츠 계발에 앞장서고 있다. 1대의 강습과 보급을 통해 ‘뿌리’를 내렸고, 2대의 계승과 발전을 통해서 ‘줄기’를 뻗게 했다면, 3대의 ‘창조와 확산’을 통해서 ‘열매’를 맺게 하고 있는 셈이다.

인천의 탈춤 3대를 바라보면, 한국탈춤의 새로운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양소운의 1960년대, 차부회의 1990년대의 활동이 있었기에, 2020년대의 활동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활동의 덕분으로 탈춤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지정 받을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은율탈춤 1과장 가면과 의상 전시(은율탈춤 전수관)
은율탈춤 1과장 가면과 의상 전시(은율탈춤 전수관 - 사진 유광식)

 

1대 양소운, 가무악희에 능통하다

인천의 탈춤명가를 만들어낸 1대 양소운(1924 ~ 2008)은 봉산탈춤, 강령탈춤, 은율탈춤 등 세계의 탈춤을 모두 섭렵했다. 이 외에도 해주검무로도 유명하고, 배뱅이굿으로 유명하다.

한국의 전통예술은 가무악희(歌舞樂戱)로 나뉜다. 노래가 있고, 춤이 있고, 연주가 있고, 놀이가 있다. 양소운은 이 넷에 모두 능통한 몇 명 안 되는 인간문화재의 한 분이다. 1967년 무형문화재로 지정 받았는데, 처음엔 봉산탈춤이었다. 봉산탈춤은 해서가면극(海西假面劇)에 속하는데, 양소운은 봉산탈춤에만 머무르지 않고, 해서지방의 또 다른 탈춤을 알리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봉산탈춤을 시작으로 해서 강령탈춤과 은율탈춤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은율탈춤은 현재 인천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고 하면, 일반인들은 이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 일인지 잘 모른다. 해서탈춤의 다른 두 종목은 서울에서 전승되고 있다. 안타깝게 우리나라는 현재 남북으로 갈린 상황인데, 해서지방(황해도)의 사람이 가장 많이 내려와서 정착한 곳이 바로 인천이다. 황해도 사람에게 있어서 인천은 제 2의 고향인 셈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인천의 중구와 동구 지역에는 황해도 출신 피난민들이 많이 거주했다.

양소운은 이런 황해도 사람들의 놀이문화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러니까 봉산탈춤도 강령탈춤도 실제 인천에 거주하는 예인들을 중심으로 전승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렇게 복원되어서 전국에 널리 알려진 것이다. 황해도 지역의 전통예술, 그것 중에서 오직 ‘은율탈춤’만이 현재 인천이 전승의 중심이 되어있다는 건, 한국근현대사의 맥락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82년 은율탈춤 정기공연 팜플렛 표지
1982년 은율탈춤 정기공연 팜플렛 표지

 

역사에 가정이란 별 의미가 없다고 하나, 만약 양소운 명인이 인천에 살지 않거나 인천에 대한 애착이 크지 않았더라면, 은율탈춤도 결국 서울이나 다른 도시를 중심으로 전승되었을지 모른다. 은율탈춤을 비롯한 황해도지역의 기예(技藝)가 인천을 중심으로 전승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 된 예인이 양소운이라는 건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인천시 중구 내동 5번지. 국악인들 사이에 참 유명한 곳이다. 생전 양소운 명인이 살았던 곳이다. 또 따른 전수 장소가 있긴 했으되 때론 선생께선 집에서도 가르쳤다.

"어머니가 유명하셨기에 때문에 전국에서 주소 하나 들고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동인천역에서 내려서 축현학교를 거쳐서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왼쪽 편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렇게 해서 명인을 찾아가면 분명 전통예술의 길이 열린 것이다 라는 소문도 나 있었어요".

“집솥에 밥이 떨어져서는 안 된다.” 양소운은 평생 그렇게 살았다. 아주 늦은 밤이 아니면, 그 집은 빗장을 잠그지 않았다. 전국 어디에서나 누구든 찾아올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다. 그 집에는 황해도의 기예를 배우고자 찾아오는 이들도 있었고, 행상이 마루에 짐을 풀고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기도 했다. 또한 살기 어려운 이가 따스한 밥 한술로 몸과 마음을 녹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양소운 선생은 사사계보가 분명하다. 김진명이 스승이다. 북한의 공훈배우로, 1991년 송년통일음악회를 통해서 서울에서도 소리를 했다. 그 때 북측의 김진명과 남측의 양소운, 스승과 제자가 만나서 얼싸안고 울고 웃은 얘기는 지금까지도 국악계에 ‘살아있는 신화’처럼 전해진다.

1990년 12월 9일과 10일, '송년통일음악회'가 이틀간 열렸다. 9일은 예술의 전당에서 남측이 먼저 시작을 했고, 10일은 국립극장에서 북측이 먼저 시작했다. 북한의 최고령 성악가(서도명창)이자 인민배우 김진명은 공연에서 남측의 제자 양소운(당시 봉산탈춤 인간문화재, 인천 거주)이 거기서 만났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던 김진명은 객석에서 나오기 시작한 추임새에 점차 놀랐다. 제자 양소운의 추임새였다. 공연이 끝난 후, 분장실에서 만난 스승(김진명)이 제자(양소운)을 보고 한 첫 마디! "왜 이렇게 늙었어". 두 사람은 얼싸안고 눈시울을 붉혔다.

 

차부회 부이사장과 대담하는 윤중강 국악평론가
차부회 부이사장과 대담하는 윤중강 국악평론가

 

2대 차부회, 전통문화를 기획하다

양소운과 차부회. 둘의 관계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이지만, 스승과 제자의 관계이기도 하다. 이 둘의 활동을 자세히 살피면, 인천의 공연문화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전통문화의 중심지가 어떻게 이동했는지도 알 수 있다.

1960년대, 양소운이 탈춤을 가르친 중요한 공간의 하나가 경아대(景雅臺)이다. 당시 율목동의 율목공원에 지워진 아담한 한옥으로, 1963년 2월 27일 완공하고 입주했다. 당시 유승원 인천시장은 국악을 지지했다. 경아대가 의미가 있는 건물이라는 건, 국악인들이 자발적인 모금을 바탕으로 해서 시비(市費)와 당시 대성목재와 같은 인천에 있는 기업이 마음을 모아서 건립된 건물이라는데 있다. 처음엔 이두칠(1901 ~ 1975)이 중심이 되어 인천풍류(정악)를 가르쳤다. 당시 김응학(1938 ~ 2018) 등이 이를 배웠다.

이 곳은 점차 ‘인천국악원’으로 불렸으며, 경기도국악협회 인천시지회의 역할을 맡았다. 초기에는 무용 시조 가야금 등의 강습이 이뤄지다가, 탈춤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그 주된 역할을 한 분이 양소운이다. 여름방학이면 여러 곳에 대학생들이 몰려와 양소운 선생께 탈춤을 배우면서 숙식을 했던 공간이기도 하다.

양소운이 율목공원에서 탈춤을 가르쳤다면, 차부회는 수봉공원에서 탈춤을 가르쳤다. 이곳이 바로 ‘수봉민속놀이마당’으로, 1998년부터 지금까지 인천탈춤의 메카(성지)와 같은 곳이다. ‘은율탈춤’ 정기발표는 거의 이 곳에서 이뤄졌고, 때론 자유공원에서도 시민들을 위한 공개 공연이 펼쳐졌다. 수봉민속놀이마당은 탈춤의 인류무형유산의 등재와 함께, 인천시에서 더욱 관심을 두어야 할 야외마당이다.

“서울의 잠실에 놀이마당이 있다면, 인천의 도화동에 ‘수봉민속놀이마당’이 있다!” 또 수봉민속놀이마당에선 대한민국의 무형문화재 상설공연이 이뤄졌다. 이런 공연은 거의 모두 차부회가 직접적, 간접적으로 연관이 된 공연으로, 전통예술의 기획자로서 차부회의 역량도 확인하게 되는 공연이었다. 

양소운과 차부회가 경험한 실내공연장이라면, 양소운은 ‘인천시민관’을, 차부회는 ‘인천시민회관’을 뽑을 것이다. 홍예문 근처에 위치한 인천시민관은 영화도 상영하고, 공연도 하는 복합공간으로, 여기서 무용과 탈춤을 공연했다. 지금은 인성여고가 다목적홀로 활용하고 있다. 차부회는 인천시민회관 (주안)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주안역 앞 사거리에 위치한 이 곳은 1980년대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여기서 많은 공연이 펼쳐지기는 했으나, 공연장으로서의 기능은 제대로 갖춘 공간은 아니었다.

인천시민회관 주변이 가장 바쁠 때는 ‘인천시민의 날’ 등을 맞아 ‘제물포제’ 등이 열릴 때였다

차부회는 회고한다. “‘인천시민의 날’ 즈음엔 인천이 왜 그렇게 더웠을까요? 사자탈을 쓰고 주안 시민회관 앞의 도로에서 공연을 하는데, 아스팔트의 지열로 너무도 뜨거웠어요. 정말 그 때 제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아십니까? '아, 이러다가 정말 바로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공연 팜플렛 전시(은율탈춤 전수관)
공연 팜플렛 전시(은율탈춤 전수관)

 

차부회는 인천탈춤의 ‘살아있는 역사’다. 은율탈춤 전수장학생 선정되었고(1981년), 은율탈춤 이수자 인정받았다.(1986년) 이후 1986년부터 시작해서 1997년 9월까지 햇수로 12년간을 은율탈춤보존회 총무를 역임했다. 인천지역사회에서 그는 ‘차 총무’로 불렸다. 어렵고 힘든 일은 모두 차 총무가 도맡아서 했다. 그가 나서면 힘 든 일도 술술 풀렸다. 해결사 차 총무의 역량이 발휘되었다. 혹시라도 어머니 빽으로 큰 일을 맡았다는 소리는 정말 듣기 싫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다. 총무 역할을 맡으로면서도 공연을 빠진 것은 한 번도 없다.

그곳은 오래전 민관식이 무용학원을 했던 곳이다. 사람들은 그곳을 ‘인천국악원’이라고 불렀다. 2층을 올라가려면 나무가 쪼개져 떨어져나갈 것 같은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2층의 창문을 열면 다방이 보였다. 바로 ‘가락다방’이었다. 더운 여름날이면, 아침에 일단 커피 한잔 시켜놓았다.

1979년부터 1980년에 이르는 즈음, 차부회는 오직 탈춤과 관련된 생각과 일만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목이 마르면 가락다방을 향해서 소리쳤다. “얼음 좀 줘”하면 두 집 사이로 얼음을 전달했다. 무형문화재 전수장학금을 받는 날이면, 화평동에 있는 광신주점에 갔다. 감자탕을 먹었고, 그 감자탕을 안주 삼아서 막걸리 몇 통을 비우던 시절이었다. 먹을 것이나 입을 것 등은 다 둘째였고, 오직 탈춤과 함께 하는 게 큰 행복이었다.

 

하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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