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김윤아’의 〈비밀의 정원〉(2010년)
유년기를 뜻하는 라틴어 단어 ‘enfance’의 어원은 말하지 못하는 상태를 이르는 'infans'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유년기를 스스로 자신을 증언하거나 설명할 적절한 언어를 가지고 있지 못한 수동적 시기로 보는 것도 옳은 걸까요? 마치 선악과를 먹고 추방된 아담과 하와가 다시는 보지 못할 에덴의 풍경을 그리워하듯, 수 많은 이야기 속에서 유년기는 마치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순수한 환상의 공간으로 그려지는 일이 흔한 것 같습니다.
17세기 계몽주의 시대 이전의 어린이는 그저 ‘작은 어른’, 그러니까 축소, 혹은 열화된 어른 정도의 개념으로 표현되곤 했다 합니다. “성인의 위험과 어려움에 직면하기 전의 짧은 안식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날들”. 유년기를 표현한 루소의 문장들은 계몽주의 시대 이후 유년기에 대한 낭만적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근대적 사고방식은 ‘어린 시절’을 이를 때 통속적으로 따라오는 ‘돌아오지 않을 순수한’이라는 형용을 통해 아직도 흔하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낭만적 관점 속에서, 유년기는 이제 아직 에덴에 머물러 있는 창세기 신화 속 아담과 하와처럼, 어른이 되어 세상으로 추방되기 전의 순수하고 신성한 존재들이 머무는 장소가 됩니다.
이러한 낭만주의적 세계관에 걸맞는, 아이처럼 순수하지만, 그러나 어른들의 신성함이 극적으로 성립하는 장소가 있다면, 바로 로맨스일 겁니다. 로맨스의 성립이란 순수하고 신성한 규율의 성립이고, 그래서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마치 세상과 분리되어 자신들만의 외부 불가침하며, 고유한 약속의 장소로 회귀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로맨스는 유년기라는 태고의 안식처에서 추방된 아담과 하와가 고안해낸 어른들의 안식처인 셈이죠.
소녀와 소년의 로맨스를 그린 이야기를 보는 것은 그래서 흥미롭습니다. 어른들의 안식처인 로맨스라는 운명적 규율이 또 다른 신성함의 장소인 어린 시절의 안식에 균열을 내는 광경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선악과를 먹기 전의 아담과 하와가 운명적으로 에덴에서 추방된 자신들을 동경하는 역설적 상황 속에 빚어지는 마찰이며, 그렇게 평범한 어른들의 세계에서 유년기의 로맨스란 온전히 성립하지 못하는 애달픔으로, 또 허락되지 않은 모순으로 극적 정념을 불러일으키기 쉬운장소인 것입니다.
<비밀의 정원>의 소녀와 소년의 로맨스 역시 그러한 모순을 암시하듯 “다른 모든 사람들 몰래 사랑에 빠지”며 시작됩니다. 이들의 처지를 이끄는 건 ‘사랑’이라는 ‘운명’이고, 이 사랑의 운명이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어른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순간, 이제 에덴에서 추방된 자들의 안식으로 발명된 로맨스라는 순수한 약속의 영역은 “사랑의 이름을 한 잔인한 놀이”가 되어, 또 다른 순수의 영역인 유년 시절의 금지된 선악 열매 그 자체로 나타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밀의 정원>은, 에덴의 ‘순수한 아이들’에게 로맨스라는 선악과를 금기로 새기는 야훼의 교훈극이며, ‘평범한 사랑’이 운명으로 작동하는 세계의 잔혹동화입니다.
그리고 이토록 극도로 순결한 세계의 명료함 앞에 질문하게 됩니다. ‘과연 순수한 어린 시절이란 존재하는가?', ‘정말 순수한 로맨스란 존재하는가?’. 왜냐하면, 지극히 ‘평범한 어른 세계’의 교훈극이 잔혹하게 들리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존재를 설명할 언어를 갖지 못한’ ‘유년기적 존재들’이 하얗게 표백되어 질려 있는 광경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이야기처럼
시작은 소녀와 소년이
다른 모든 사람들 몰래
사랑에 빠지는 것
영원을 꿈꾸는 소녀
사랑을 구하는 소년
비밀의 정원의 문이 열리네
슬픔의 문이 열리네
단 한 번의 입맞춤으로
두 사람은 하나가 되고
모든 게 변할 거라
쉽게 말하지 말아요
사랑은 끝나지 않으니
무엇도 두렵지 않아요
운명이 우리 곁에 있으니
비밀의 정원의 문이 열리네
슬픔의 문이 열리네
상처도 아픔도 모르던
순결한 소녀와 소년은
사랑의 이름을 한 잔인한 놀이로
서로를 부숴버리네
다른 모든 이야기처럼
시작은 소녀와 소년이
다른 모든 사람들 몰래
사랑에 빠지는 것
다른 모든 이야기처럼
마지막은 소녀와 소년이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어른이 되는 것”
- ‘김윤아’ <비밀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