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남가에 전해오는 술 제조법... 인천 전통주 복원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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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남가에 전해오는 술 제조법... 인천 전통주 복원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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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9.07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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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남 인문학 12강을 듣다]
(9) 소남가에 전해오는 인천의 명주 삼해주
- 장진엽 성신여대 교수
[인천in]이 소남학회, 계양도서관과 함께 5월10일부터 9월20일까지 12차례에 걸쳐 계양도서관이 진행하는 '길위의 인문학' - 소남 윤동규를 탐구하는 인문학 강좌를 요약해 연재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의 수제자로 성호학파를 인천으로 확산시킨 소남을 통해 인천의 역사와 정신적 문화유산을 함께 탐구하며 인천 역사를 지평을 넓혀본다. 아홉번째 순서는 장진엽 성신여대 교수(한문교육과)의 ‘인천의 술 주방문 – 소남가에 전해오는 인천의 명주 삼해주’이다.

 

 

 

쓸쓸한 집 적막해 참새를 잡을 만한데(閑門寂寞雀堪羅)

군수가 방문할 줄 생각이나 했으랴(豈意君侯肯見過)

게다가 한 병 술 가져오니 정이 두터운데(更把一壺情已重)

더구나 삼해란 술, 맛이 아주 좋구나(況名三亥味殊嘉).

- 이규보(1169~1241) <내가 따로 시 한 수를 지어, 삼해주를 가져다 준 것에 사례하였다(予亦別作一首, 謝携三亥酒來貺)>에서

 

이규보는 52세 되던 1219년 5월 계양도호부사 병마검할(兵馬鈐轄)로 부임해 1년여를 인천에서 지낸 적이 있다. 당대 무인정권이 대몽 항쟁을 위해 수도를 강화로 옮겼을 때 그도 그곳으로 수행하였다. 이때 나이 65세로, 그는 강화도, 즉 인천 사람으로 생을 마쳤다. 말년에 인천 사람이 된 이규보가 인천의 술 삼해주를 매우 좋아한 것이 인상적이다. 이규보는 재상이 된 후에도 전쟁 중이라 살림이 늘 넉넉하지 못했으니 고급술인 삼해주를 자주 맛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계양도서관이 진행하는 '길위의 인문학' - 소남 윤동규 9번째 강좌가 ‘인천의 술 주방문 – 소남가에 전해오는 인천의 명주 삼해주’를 주제로 6일 오후 7시 계양도서관에서 장진엽 성신여대 교수(한문교육과)의 강의로 열렸다.

소남 윤동규 집안에는 전통 가양주(家釀酒)인 ‘삼해주(三亥酒)’ 주방문(酒方文)이 전해온다. 소남 종가의 <일년쥬방문(一年酒方文)> 가운데 정월 부분에 적힌 주방(酒方)이 바로 삼해주 제조법이다.

삼해주는 서울과 인천 지역에서 주로 빚었으며, 세 번 담근 술인 ‘삼양주(三釀酒)’ 중에서도 최고급 술로서 부유층과 명문가에서 담그고 소비했던 술이다. 장진엽 교수는 "소남가에 전해오는 주방문을 활용하여 인천을 대표하는 고급 전통주를 복원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종가 소장 주방문
소남 종가 소장 주방문(한글이다)

 

- 가양주(전통주)의 개념와 분류

‘가양주(家釀酒)’란 집에서 빚은 술이다. 우리가 ‘전통주’라고 부르는 술은 본래 모두 가양주였다. 가양주는 곡식을 주재료로 하여 천연발효제 누룩과 물을 넣고 발효, 숙성시킨 술, 즉 곡주(穀酒)를 가리킨다. 여기에 가향재나 약용 약재를 더하기도 한다.

주방(酒方), 또는 주방문(酒方文)은 전통 시대 술 제조법을 뜻한다. 일반적인 제조법이 아니라, 특정한 술에 대한 레시피이다. 옛날 양반 집안에서는 집안 대대로 전해오는 주방이 있었다. 그것도 한 종류의 술이 아니라 계절과 절기에 따라, 상황에 따라 필요한 다양한 술에 대한 제조법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한 주방문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도 있지만, 대체로는 구전으로 전해졌다.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 사대부 집안에서는 술이 떨어져서는 안 되었는데, 즉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서는 술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살림이 넉넉하고 그렇지 않고를 떠나서 이 두 가지를 제대로 거행해야만 사대부 가의 체모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상에게 바치는 술이 정결해야 효자의 마음이 편안할 것이고 빈객을 잘 위로해 줌으로써 일상에서 예의 정신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유교문화와 농경문화, 이 두 가지가 가양주 문화의 주된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가양주 문화는 유교가 보편화된 조선시대에 들어 활성화된 것이지만, 술 빚는 방법은 고려 이전부터 전해오던 것을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가양주의 전통은 1909년 일제의 주세법 도입 이후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고, 근래까지 거의 그 전통이 단절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 1980년대 이후 정부에서 곡물 소비 촉진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1995년 ‘자가소비를 위한 자가주조’를 허용하면서 가양주 제조가 법적으로 가능해졌다. 그러나 단절의 역사가 길어 복원이 쉽지는 않다. 다행히 관심 있는 이들이 적극 노력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대중적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전통주를 분류하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다. 원료에 따라서 순곡주, 약용곡주, 가향곡주로 분류할 수 있다. 곡물만을 썼는지 약재나 가향재를 넣었는지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또, 거르는 방법에 따라 탁주(濁酒), 청주(淸酒), 소주(燒酒)로 분류할 수 있다.

담그는 방법에 따라서도 분류할 수 있다. 한 번 담근 것을 단양주(單釀酒), 밑술을 만들고 덧술과 섞어 두 번 담근 것을 이양주(二釀酒), 덧술을 두 번 하여 도합 세 번 담근 것을 삼양주(三釀酒)라고 한다. 서민들이 즐겨 마셨던 막걸리는 순곡주이면서 단양주 탁주이다. 사대부 집안에서 썼던 대부분의 청주는 이양주다. 가장 고급술은 당연히 삼양주이다. 삼양주는 색이 맑고 달지 않으면서 맛은 진하면서도 순하다. 향도 아주 깊다.

 

- 서울과 인천의 명품주 삼해주

삼해주(三亥酒) 이름에 돼지 해(亥)자가 들어간 이유는 ‘해일(亥日)’에 술을 빚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연도뿐 아니라 날짜도 육십갑자를 이용해서 표기했다. 삼해주는 정월 첫 해일에 술을 빚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다음 해일, 즉 12일이 지난 후에 덧술을 한다. 그리고 또 12일이 지나서 다음 해일에 2차 덧술을 한다. 삼해주 주방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12일마다 덧술을 하기도 하고, 36일마다 덧술을 하여 석 달에 걸쳐 술을 빚는 방식도 있다. 기본적으로 삼해주 제조의 핵심은 장기 저온 발효이다. 보통 술들은 20~25℃에서 발효시키는데, 삼해주는 10~15℃에서 발효시킨다.

이 삼해주는 서울과 인천 지역에서 많이 담그던 술이었는데, 다른 지방의 문헌에서도 삼해주 제조법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면 여러 지역에 그 제조법이 확산되었던 듯하다. 돼지의 날인 해일에 술을 빚는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돼지가 재물과 복의 상징이었기에 그런 듯하다.

삼해주 제조법이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1540년경에 김유(1491∼1555)와 그의 손자 김령(1577∼1641)이 편찬한 『수운잡방(需雲雜方)』(1540)이다. 안동 김씨 장계향(1598~1680)의 한글 요리책 『음식디미방』(1670)에는 네 가지의 삼해주 제조법이 수록되어 있다. 그 외 홍만선(1645~1715)의 『산림경제(山林經濟)』를 비롯해 20여 종의 문헌에서 삼해주 제조법이 확인된다. 일제 시기에 간행된 요리책 『가정일용보감(家庭日用寶鑑)』(1912)과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鮮無雙新式料理製法)』(1924)에도 삼해주 빚는 법이 소개되어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가양주 전통이 완전히 잊히지는 않은 것이다. 여러 문헌들에 나온 삼해주 제조법은 16가지나 된다.

 

음식디미방
안동 김씨 장계향(1598~1680)의 한글 요리책 『음식디미방』(1670)

 

조선시대 문인들도 자신의 시와 글에서 삼해주를 언급했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1431~1491)이 어느 날 소요재(逍遙齋) 최숙정(1432~1480)의 집을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러자 최숙정이 시를 보내서 미안함을 표했다. 그 시에 “항아리의 좋은 술은 해일이 세 번 경과했고 / 뜨락의 새 죽순은 두어 마디나 자랐다오.[甕中綠蟻經三亥 階上新篁長數科]”라는 구절이 있었다. 삼해주가 익었으니 죽순을 안주 삼아 조촐한 술자리를 가지자는 뜻이다.

김종직은 이에 대해 “새 죽순에 맑은 술 진정 저버리기 어렵네 / 더구나 우리들은 한가한 날도 많으니[新篁淸酒眞難負, 況是吾曺暇日多.]”라고 답했다. 눌재(訥齋) 박상(1474~1530), 용재(容齋) 이행(1478~1534), 장음정(長吟亭) 나식(1498~1546), 고봉(高峯) 기대승(1527~1572), 지봉(芝峯) 이수광(1563~1628), 간송(澗松) 조임도(1585~1664), 죽당(竹堂) 신유(1610~1665) 등의 시에도 삼해주가 등장한다.

성호학파의 스승인 성호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 만물문(萬物門)의 ‘오재ㆍ삼주(五齊三酒)’ 항목에서도 삼해주를 언급하고 있다. “큰 술집에 삼해주와 오병주(五丙酒)라는 술이 있는데, 빚은 후에 흰 곰팡이가 끼고 맛이 시어져서 좋은 술이 될 수 없을 듯하나, 한 달쯤 지나면 바로 맑은 술이 되어서 맛이 아주 달고도 톡 쏜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성호는 자신은 청명주(淸明酒)를 가장 좋아한다면서 그 제조법을 상세히 기록해 두었다. 성호가 설명한 청명주는 이양주이다. 성호뿐 아니라 성호학파의 문인들 중에는 술을 즐기고, 잘 마셨던 이들이 많다. 바로 밑의 제자인 순암(順菴) 안정복(1712~1791)도 그랬다. 그 아래 세대인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은 항상 술을 경계했지만 스스로 주량이 보통이 아님을 자랑했다.

소남의 손자뻘인 무명자(無名子) 윤기(1741~1826)도 술을 즐겼고, 또 시에서 삼해주를 칭송했다. 1785년 <입춘(立春)>에서 “좋은 술 삼해주를 빚어두고서 / 향그러운 오신채 맛을 보누나[妙釀謀三亥, 香芽試五辛.]”라고 했다.

 

윤신 호구단자
윤신 호구단자

 

- 조선시대 금주령

삼해주는 세 번 빚는 삼양주이므로 곡식의 소비가 매우 컸다. 조선시대에는 흉년이 들면 나라에서 ‘금주령(禁酒令)’이 내리곤 했다. 식량으로 써야 할 곡식이 술 빚는 데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조선 후기 들어 삼해주 제조가 확산되면서 그것을 만들어 파는 것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까지 나타났다. 제사나 손님 대접에 쓸 술 외에도 고위층들의 삼양주 수요가 커졌던 것이다. 『영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보면 영조 4년(1728), 9년(1733), 10년(1734)에 금주령을 건의하는 신하들이 특별히 삼해주를 문제 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조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다만 정조는 금주령을 강하게 시행하는 것에는 부정적이었다. 술은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고, 금지한다 해도 술 만드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식적으로 금하기보다 한성 판윤이 백성들에게 잘 타일러서 절제하게 하라고 하였다. 

서울 주변의 삼해주 제조는 이 시기 들어 점점 더 성행하고 있었다. 『일성록』 순조 7년(1807) 10월 16일 기사에서는 “서울의 오부(五部)로 논하자면, 연강(沿江)에서 삼해주를 빚는 것으로 생업을 삼는 자들 가운데 술을 많이 빚는 사람은 혹 수백 섬에 이르고 적게 빚는 사람도 100여 섬을 밑돌지 않는데, 이렇게 술을 빚는 집이 몇천 호나 되는지 알지 못할 정도입니다. 도성의 사방으로 통하는 큰길가에는 날마다 수 섬을 소비하는 자들이 즐비하니, 1년에 소비하는 양을 통틀어 계산하면 도리어 도민(都民)들이 식량으로 먹는 양보다 몇 배나 더 됩니다.”라는 말이 보인다.

삼해주가 고급술의 대명사가 되면서, 몇몇 가문에서 전해오던 삼해주 제조법이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상업적으로 제조, 판매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758~?)의 〈주사거배〉(酒肆擧盃)금주령 시행에도 불구하고 몰래 술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간송미술관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758~?)의 〈주사거배〉(酒肆擧盃). 금주령 시행에도 불구하고 몰래 술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간송미술관

 

- 소남가에 전해오는 삼해주 주방문

인천 청학동 사모지고개는 ‘삼호현(三呼峴)’이라고도 쓰는데, 백제 때 중국으로 가는 사신을 배웅하던 곳이었다. 사모지고개는 ‘삼해주고개’라고도 불렸다. 1760년판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경기도-인천도호부’의 ‘고적(古跡)’ 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삼해주고개[三亥酒峴]는 문학산(文鶴山) 서쪽 기슭에 있다. 그 위에 큰 바위가 있는데 바위 꼭대기에 구멍이 있어서 모습이 꼭 동이[盎] 같다. 세속에 전하기를 옛날 삼해주가 그 안에 가득 차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었지만 감히 한 잔 이상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뒷날 어떤 사람이 조심하지 않고 과음했더니 그 뒤로는 술이 말라버렸다고 한다. 고개가 이런 이름을 얻은 것은 이 때문이다.”

아마 ‘사모지’의 발음이 ‘삼해주’와 비슷해서 이런 이름이 생겼을 테지만 주민들이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덧붙였을 것이다. 그만큼 인천 사람들이 삼해주를 잘 만들고, 또 즐겨 마셨다는 방증이다.

그런데 소남가에 삼해주 주방문이 전해온다. “일년쥬방문”이라는 제목으로 전하는 한글 문서이다. 현재 이 주방문은 정월과 2월분만 남아 있다. 그중 정월의 주방에 “정월 첫 해일에 백미 다섯 되를 여러 번 씻어 가루를 내어 (…) 개어 식힌 후, 밀가루 다섯 되를 가루를 내어 개어서 식힌 후 맞은 항아리에 넣어 서늘한 곳에 두었다가, 정월 그믐께나 2월 초순쯤에 백미 세 말을 여러 번 씻어서 가루를 내어 무리떡 찌니 (…)”라고 적혀 있다. 술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삼해주 제조법이 분명하다.

소남이 어릴 적 살았던 주소는 “한성부 용산방(龍山坊) 도화동(桃花洞) 제○통 제○호”이다. 마포 도화동은 곧 용산방의 첫 동네로서, 삼해주를 많이 빚기로 이름난 곳이다.

‘송도향주조’는 인천 남동구 논현고잔동에 있는 양조장 ‘송도향’에서 출발하였다. 여기서 만드는 전통주 삼양춘(三釀春)이 바로 삼해주이다. 강학모 대표가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만들었던 인천 삼해주의 주방을 복원하여 제조한 술로서, 현재 인천을 대표하는 전통주로 크게 성장했다.

그러나 이 삼양춘은 정확한 주방에 의해 제조된 것은 아니다. 소남 종가에 전해지는 주방문을 참고하면 당시 인천에서 마셨던 바로 그 삼해주를 복원하는 것이 가능하다. 문서의 훼손된 부분을 잘 검토하여 이 주방을 오늘날에 되살릴 필요가 있다.

이 대목에서 장진엽 교수는 그 술의 이름은 ‘소남삼해주(邵南三亥酒)’가 적절할 것이라고 했다. 인천의 ‘잊혀진’ 실학자 소남 윤동규의 이름이 어쩌면 우리의 전통술 삼해주의 명성과 함께 널리 알려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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