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에네켄 기계(한국이민사박술관)
녹이 슨 기계는 아픈 이야기를 품고 있다. 100년 전 누구의 손끝에서 기름칠 되고 소용 있게 움직였을 이 기계의 이름은 에네켄 기계이다. 에네켄 기계는 지금 한국이민사박물관 야외에서 118년전 우리 민족의 디아스포라를 무언으로 증언하며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에네켄과 에네켄 기계
에네켄(Henequen)은 선인장과에 속하는 용설란의 일종으로, 다육질의 잎이 아주 두껍고 날카로운 섬유식물이다. 영어로는 사이잘(Sisal), 스페인어로는 소스퀼(Sosqill) 또는 헤네켄(Henequen) 우리말로는 하얀마(麻)라고도 불린다. 멕시코의 한인는 에네켄을 어주기, 어주구, 어주귀라고도 부른다. 잎의 길이가 2m, 너비가 30~40cm에 이르고, 한 나무에 50~100개씩 잎이 있다. 이 잎을 으깨어 삼실 밧줄과 자루를 만들어 냈다.
한국이민사박물관에 전시된 에네켄 기계는 멕시코 유카탄반도 메리다(Merida) 근처의 티치물 아시엔다 (Ticimul hacienda) 농장의 것을 복원한 것이다. 전체에 동력을 제공하는 엔진과 도르래 시스템, 잎을 섬유와 껍질로 분류하는 본체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박물관에서는 엔진과 본체, 도르래 시스템의 기어 일부만 전시하고 있다.
전시공간에는 이 기계로 밧줄을 제작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소개하고 있어 관람객의 궁금증을 해소해주고 있다.
미국 농업 산업화와 식민지 쟁탈전, 조선 백성을 멕시코로 몰아가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 미국의 밀 생산이 증가하자 이를 담는 자루의 생산과 수출하는 배의 수송량도 증가했다. 열강은 막바지 식민지 쟁탈전으로 각 지역에 뱃길을 열었다. 자루와 선박의 밧줄을 만드는 섬유 생산의 수요도 증가해 생산지인 멕시코의 근로자는 부족했고 자연스럽게 이주근로자가 필요했다.
이 시기 지구 반대편의 조선은 폭정과 기근으로 백성들은 살기 위해 간도로, 연해주로 이주했다. 그리고 1902년 ‘하와이 이민’을 시작하며 태평양을 넘는 이주가 시작되었다. 뒤 이어 1905년 1,033명의 한인이 영국 상선 일포트호(S.S.Iford)를 타고 인천 제물포를 출발하여 멕시코에 도착했다.
부푼 꿈을 안고 도착한 지상낙원. 그러나.
멕시코 남부 살리나 크루즈(Salina Cruz) 항에 내린 한인들은 30여개의 에네켄 농장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가족 이민자들도 농장주의 마음대로 각 농장으로 흩어지기 일쑤였다. 조선에서 들은 멕시코는 지상낙원이었다. 기후, 인심, 급여, 의료복지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을 맞이한 것은 유카탄반도의 불볕 더위, 끝 없는 에네켄 밭, 저 임금, 이산, 그리고 강제 노동과 채찍이었다.
에네켄 농장의 하루는 오전 5시에 시작하며 밤 늦게까지 하루 1천장의 에네켄 잎을 잘라야 했다. 목표량에 이르지 못하면 채찍을 맞아야 했다. 노예와 같은 생활에 자살을 한 사람도 있고, 탈출하다 길도 모르고 말도 몰라 붙잡혀 돌아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후, 멕시코 이민은 다시 추진되지 않았다. 마이어스(John G.Myers) 라는 중개인에 의해 단 한 차례로 끝난 대규모의 불법 노동이민이었기 때문이다.
“일하기 시작한 첫날부터 우리들의 손이 엉망이 되었는데, 특히 왼손은 에네켄 가시에 찔리고 긁혀 하루도 피가 멈출 날이 없었다. 발가락부터 무릎까지 온통 가시에 찔려 항상 몸이 엉망진창이 됐으며 가시가 엉겨 붙은 채 집에 돌아와서는 가시를 빼고 상처를 만졌다. 감독들은 일을 느리게 한다거나 잘못한다고 하여 채찍으로 때리기 일쑤였다. 이와 같이 냉혹한 현실 속에서 우리들은 심각한 언어장애와 이질적인 문화로 상당한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 <최병덕 선생의 회상 ; 인천한국이민사박물관>
사라진 조국, 그러나 삶을 일구고 독립을 꿈 꾸다.
1909년 5월, 4년간의 노예 노동계약이 끝났다. 그러나 한인들은 경제적으로 자립할 능력이 없었다. 당시 멕시코에서는 멕시코혁명으로 내전이 일어났는데, 그럼에도 한인은 조선으로 돌아가기 어려웠다. 외교권은 이미 빼앗겼고 이듬해 1910년에는 나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앞서 미주에 있는 대표적인 한인 단체인 대한인국민회가 멕시코 동포를 위문하는 활동 끝에 1909년 5월 9일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가 창립되었다. 강제 노동계약 만기를 3일 앞둔 날이었다.
이후 멕시코의 한인들은 동포들의 각 지역에 지방회를 설립하고 독립운동 후원과 동포 자조 조직을 형성했다. 1910년에는 숭무학교(崇武學校)라는 한인 무관 양성학교를 개교하여 생도 118명을 배출했다. 멕시코 당국의 사적 집회 금지 조치로 비록 채 3년을 채우지 못하고 폐교했지만 독립을 위한 해외 무장독립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멈추지 않은 디아스포라, 그리고 조국의 독립
멕시코 한인은 노예 같은 강제 노동계약이 끝나 자유 노동자가 되었지만 상황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한인들은 학교를 설립하여 저녁마다 아이들을 가르쳤다. 어떤 이는 상점을 개업하고, 어떤 이는 여관과 식당을 개업하기도 했다. 지방회는 각 농장주들과 좀 더 나은 조건의 협상을 조력했다. 3.1운동을 함께 기념하고, 독립자금을 꾸준히 모금하고, 광복 후 전쟁과 기아로 신음하는 조국을 위해 난민 구제금을 마련하여 조국에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합성섬유의 개발과 정치·경제적인 이유로 유카탄반도의 섬유산업은 사양길로 접어들었고, 에네켄 농장의 재고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사이 어떤 사람은 멕시코 혁명에 투신하여 망국의 설움을 달래려 했고, 어떤 사람은 과테말라 혁명군의 용병이 되기도 했다. 어떤 이는 생존을 위해 쿠바로 재이민을 가며 멕시코에 이주한 1세대인 부모와 재이산하기도 했다. 그렇게 후손들은 경제적인 이유, 정치적인 이유로 흩어졌다. 모여있던 사람들이 흩어지자 50년대 말 멕시코 한인회의 중심이었던 메리다한인회는 폐쇄되어 소수의 한인 후손이 명맥을 잇고 있다.
멕시코 한인의 이야기는 그렇게 녹슨 에네켄 기계와 함께 멈춰졌다. 그 기계에서 탄생한 무수한 에네켄 삼실줄이 멕시코 한인의 한(恨)과 염원의 이야기를 알고 있을까. 자신을 갖은 역경으로 내몰았던 조국을 걱정하고 사랑한 멕시코 한인의 애환과 열정을 아무도 몰라주어 에네켄 기계는 그리도 붉게 녹이 슬어버린 것일까. 녹이 슬어 버린 것은 어쩌면 그들을 잊어버린 우리의 기억이 아닐까.
750만명의 재외동포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재외동포청이 출범하여 인천에 설치된 올해, 녹슨 에네켄 기계를 보며 이후 멕시코 한인의 이야기가 어디에 어떻게 담길지 궁금해진다.
참고 ; 한국이민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