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돌과 갈판 – 신석기인들의 主 식기세트
상태바
갈돌과 갈판 – 신석기인들의 主 식기세트
  • 조세은 객원기자
  • 승인 2023.12.22 16: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물관 속으로]
(9) 신석기시대 갈돌과 갈판
인천in이 인천시립박물관과 협력하여 본관 및 분관 소장 유물들을 탐사하고 독자 시민들에게 소개합니다. 인천의 역사 문화를 대표하는 박물관 속 유물들은 어떤 것들이 있으며 어떤 유래와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아보며 지역 역사 문화의 소중함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갈돌과 갈판

 

올 최대 추위가 찾아왔다. 감칠맛이 좋은 바지락국에 잘 반죽 된 칼국수를 넣어 먹으면 딱 좋은 날씨이다. 손 끝에 부드럽게 감기는 밀가루을 느끼며 불현 듯 드는 생각. 옛 사람들은 이 추위에 뭘 먹고 살았을까? 궁금증은 귀찮음을 이기는 법, 칼바람을 뚫고 인천시립박물관을 찾았다.

 

- 인천, 선사시대 사람들의 훌륭한 거처였다

인천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강화도, 서구 원당동, 불로동, 가좌동, 미추홀구 문학동에서 뗀석기와 같은 구석기 시대 유적이 발견되어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신석기 시대는 수렵 및 채집과 동시에 원시적인 농사를 시작했던 시기이다. 그러나 당시의 농업기술은 초기단계로 농업생산물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어려웠다. 구석기 시대부터 식량 조달원이었던 수렵, 채집 생활을 지속해야 했다. 그런데, 수렵은 기술이 풍부해도 위험과 체력소모가 큰 작업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쉬우면서, 안정적인 채집이 용이한 지역에 안착해야 생존에 유리했다.

이런 점에서 인천은 얕은 바다와 넓은 갯벌을 갖고 있어 안정적으로 해산물을 채집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으로 인천은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훌륭한 생활 근거지가 되었다. 얕은 바다나 갯벌에서 조개나 물고기를 잡았고, 동시에 농사를 짓다 보니 식량을 저장하는 토기도 만들게 되었다. 동물의 털이나 가죽, 식물에게서 실과 옷감을 얻게 되어 간단한 옷도 만들 수 있었다. 이렇게 신석기인들이 실용적인 물품들을 만들어가며 본격적으로 생활을 한 결과 인천은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의 보고라 불리우기도 한다.

 

선사시대 인천의 주요 유적 분포(인천시립박물관)
선사시대 인천의 주요 유적 분포(인천시립박물관)

 

- 신석기 시대 최첨단 주방기구- 갈돌, 갈판

선사시대 인류는 식량을 어떻게 조달하고 섭취, 보관하는지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수렵과 채집에 의존했던 구석기 시대와 달리 신석기 시대는 식량 조달, 섭취 및 저장 방식에서 많은 변화를 이루었다. 과거엔 질기고 딱딱한 채로 먹거나, 불에 직접 구어 먹었지만, 신석기 시대엔 도구를 활용해 껍질을 까고 곱게 가루로 만들여 물과 함께 반죽하여 굽고, 그릇에 넣고 끓이거나 찜으로도 먹었다.

즉, 음식을 가공했다는 의미인데, 이때 사용했던 도구가 바로 갈돌과 갈판이다. 갈돌과 갈판은 한 세트인데, 갈판 위에 곡물이나 열매를 놓고 갈돌로 밀어 눌러 으깨는 등의 충격을 줘 껍질과 알갱이, 과육이 분리되도록 하는 도구이다. 갈돌에 의해 눌림을 받는 갈판은 허리 부분이 완만하게 패였는데, 처음부터 그런 형태로 가공되었는지, 아니면 많은 곡식과 열매를 가공하느라 마모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두 개의 돌 이 교묘하게 맞아 떨어져 당시 신석기 시대 사람의 식사를 책임졌을 것이다.

 

 

갈돌과 갈판은 곡물 또는 열매를 가루로 만드는 역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절구, 맷돌의 기능과 비슷하다. 신석기인들은 갈돌과 갈판을 이용해 도정을 하고 기호에 따라 곡물을 갈아 반죽하거나 떡이나 죽을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현대에도 세계 각곳에서 갈돌과 갈판을 활용하는 곳들이 있다. 현대 멕시코 어떤 지역에서는 메타테(Metate)라는 갈돌과 갈판을 이용해 옥수수를 갈아 또띠아를 만들기도 하고, 인도에서는 아미칼루(Ammikallu), 실바타(Sil Batta)라고 불리는 갈돌과 갈판으로 향신료를 갈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돌확에 양념을 갈아 풍미를 살리는 요리를 하기도 한다. 선사시대부터 내려온 주방기구가 여즉 유용히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의 테크놀리지는 유효기간이 상당히 긴 것 같다.

 

신석기인의 보물창고 [빗살무늬 토기]

빗살무늬 토기

 

신석기인들의 음식 저장 방식도 혁명적이었다. 쉽게 손상되는 헝겊이나 가죽, 등 자연에서 조달한 저장 용기에 일시적으로 저장했던 인류는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어 보관하기 시작했다. 그릇 표면에 빗살무늬가 있어 빗살무늬토기라고 불리는데 무른 바닥에 꼿아 쓰기 편하도록 바닥이 뾰족한 것이 특징이지만 바탁이 평편한 토기도 발견된다. 토기는 진흙을 엿가락처럼 길게 반죽하여 동그랗게 촘촘하게 둘러 쌓는 방식으로 만든 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빗살 무늬를 넣고, 야외 화덕에서 약 700도의 불로 구워낸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낸 토기는 생각보다 단단해서 물을 넣고 식량을 끓여도 전혀 문제가 없다. 토기의 내부에 유기물 흔적들이 남아 있어 이 시대 토기는 저장의 역할 뿐 아니라 조리 기구로도 사용되었다는 것도 밝혀졌다. 곡식이나 해산물을 끓여 먹으니 부드러운 식감에 살균도 되어 선사시대 사람들의 소화 질환 개선에도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선사시대의 쓰레기장, 패총(貝冢)이 역사의 증거로

송산유적(松山遺蹟) 예상도
송산유적(松山遺蹟) 예상도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와 구분점은 바로 문자의 유무이다. 사실, 위에서 이야기한 갈돌과 갈판, 토기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이런 내용을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패총(조개무지)에서다. 인천의 거의 모든 섬에서 조개무지가 발견되고, 영종도와 삼목도, 강화도에서는 신석기인들의 집 자리와 화덕자리가 조사되는 등 많은 수의 신석기시대 유적 속에서 그들의 흔적들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유적지 중에서도 송산유적(松山遺蹟) 에서는 토기와 어로기구, 생활 도구들이 출토되어 당시의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천 서구 청라에 있던 두 개의 장금도 패총(長金島貝塚)은 당시 생활상을 더욱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패총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조개 무더기로 신석기인들이 조개를 먹고 껍질을 한 곳에 버린 곳이다. 지금의 개념으로는 쓰레기장이라고 볼 수 있겠다. 패총에는 조개 종류 이외에도 동물이나 물고기의 뼈, 토기, 석기, 골각기 등이 발견되고 있어서 당시의 자연환경과 생활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고, 시간의 흐름대로 쌓여나가는 패총의 특성상 시대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잘 살필 수 있어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갖고 있다. 장금도 패총 역시 신석기 시대 후기부터 고려 시대에 이르기까지 형성되었으며, 특히 중부 서해안 지역에서는 조사된 사례가 많지 않은 원 삼국시대외 삼국시대의 패총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한다. 아쉽게도 이러한 역사유적들은 도시개발로 모두 사라졌지만, 선사시대 사람들의 삶을 증명하는 일부의 유물들이 인천시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시대를 훌쩍 건너뛰어 시민과 조우하고 있다.

매일 최저 기온을 갱신하고 있는 요즘, 신석기인들도 좋아했을 뜨끈한 조개탕에 비록, 갈돌로 제분한 밀가루는 아닐지라도 인천 곰표 밀가루로 반죽을 밀어 칼국수를 만들어 먹어야겠다.

 

장금도 패총(인천시립박물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