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실학자 '소남 윤동규' 연구자들 한 자리에
‘소남윤동규기념사업회’ 출범 및 소남서거 250주년 맞이 기념 학술대회가 29일(금) 오후 1시, 인천 중구 국제라이온스클럽 대강당에서 열렸다. 소남은 어떤 사람이고, 성호학파 내‧외부에서 이루고자 하고 이룬 것은 무엇인지, 인문학과 자연과학 모두에 관심을 가지고 결합을 시도한 그의 성취를 어떻게 평가할지에 관한 발제와 토론이 진행됐다.
윤형덕 소남윤동규기념사업회 이사장의 기념사와 황효진 인천시문화정무부시장의 축사 등으로 기념행사가 진행된 후, 본격적으로 학술대회가 시작됐다.
학술대회는 ‘성호학파와 소남 윤동규’라는 주제로 심경호 고려대 명예교수가 기조강연을 했고, 백진우 서강대 교수가 ‘만사와 제문을 통해 본 소남 윤동규의 관계망’을, 송성섭 소남학회 연구실장이 ‘퇴계와 고봉을 뛰어넘은 성호와 소남의 사칠논쟁’을, 전성건 안동대 교수가 ‘인천 만신동계와 화위회를 통해 본 소남의 공동체 인식’을, 마지막으로 박혜민 연세대 교수가 ‘윤동규 필사본 곤여도설(坤輿圖說)을 통해 본 동아시아 한역 세계지리지 수용방식’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다.
▶소남 윤동규는 누구인가? 인천과는 연결지점은?
소남 윤동규(尹東奎, 1695-1773)는 이병휴(李秉休)·안정복(安鼎福)과 함께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의 3대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사실상 성호 이익의 맏제자이다. 파평 윤씨로서 한양에서 태어나 사부학당(국가에서 관리하는 중등교육기관) 학생이었으나, 과거를 보지 않기로 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지 않았으며, 17세인 1712년 성호 이익의 문하에 들어갔다.
성호가 살던 안산과 가까이 있기 위해 증조부 때부터 연고가 있던 인천 도림동으로 이사했다. 인천과 소남의 인연은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윤동규는 인천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호가 소남촌인(邵南村人), 즉 인천의 옛이름인 소성(邵城)과 도남촌(道南村)을 합해 만든 자호라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소남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최근에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18세기 서울·경기 지역 남인의 학맥과 성호학파 계승 과정 논의 속에서 주요 인물로 거론되기 때문이다. 특히 다른 학자들과의 학술 논쟁 속에서 드러나는 소남의 경학과 예학에 대한 연구가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인천이라는 향촌 공동체에서 지도자적 역할을 수행한 구체적인 활동에 대한 연구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성호학파와 관련된 연구에 인천이 중요한 지역으로 포함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주로 안산(성호 이익)과 경기도 광주(순암 안정복), 충청지역 중심으로 이뤄져왔다. 그러다 소남 종가에 전해 오던 ‘소남선생문집(邵南先生文集)’이 세상에 나오면서 인천 지역 학자들이 성호학파의 큰 부분을 형성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는 성호학의 실체와 조선후기 실학 연구의 외연을 넓히는 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문서다. 성호학파를 인천으로 확산시킨 중심적 인물인 소남이 새롭게 주목받는 이유다.
▶성호와 소남은 어떤 관계였나? 두 사람 간의 ‘사칠논쟁’은 왜 중요한가?
심경호 고려대 명예교수는 기조 강연에서 성호 이익과 소남 윤동규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며, 성호 이익이 세상을 떠난 후 소남 윤동규가 행장(行狀)을 쓴 것에 주목했다. 당시 묘지(墓誌)는 정산 이병휴(李秉休)가 짓고 묘갈명은 채제공(蔡濟恭)이 지었고, 윤동규는 고인의 명문·전기 등을 위해 고인의 세계·성명·자호·관향·관작·생졸연월·자손록 및 평생의 언행 등을 담은 행장을 서술하는 일을 맡았다. 근대 이전 학자의 행장은 수제자가 쓰는 것이 관례였다 하니, 당시에는 소남이 성호학파의 ‘좌장’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성호 나이 31세에 17세의 소남을 제자로 맞은 후 “나의 도가 의탁 할 곳이 있게 되었다.”라고 할 정도로 소남을 신뢰했다는 것도 중요한 일화다. 사제지간에 주고 받은 서찰이 600여 편에 이를 정도라 한다니 학문적 동지가 아닐 수 없다.
송성섭 소남학회 연구실장은 ‘성호사설’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성호와 소남이 주고 받았던 ‘사칠논쟁’에 집중했다. 성호학은 매우 포용적인 학풍으로, 풀리지 않은 의혹이 있으면 강습(講習)할 때 드러내거나 책자에 기록해 두었다가 답을 구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 후기 성호의 주장이 양명학과의 교집합을 갖게 되는 부분도 이 영향일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소남은 스승인 성호와 공동으로 작업하면서도 의견이 다를 때에는 거침없이 논쟁한다. “저는 신유(1741)년부터 신미(1751)년까지 수십 년동안 설을 여쭈어 의논하여 결정했으나, 그 사이에 여한이 남아 다하지 못한 설이 있습니다.”, “공정함과 마땅함이 리(理)입니까? 기쁨과 분노가 리(理)입니까?”와 같은 말이 논쟁의 내용을 가늠하게 한다.
소남이 성호에게 던진 질문을 다루려면, 우선 성리학에서 이야기하는 기(氣)와 리(理)에 대해 알아야 한다. 기(氣)가 물질이라면, 리(理)는 물질이 그러하게 된 이치다. 리와 기는 분명히 다른 것, '리기불상잡(理氣不相雜)'이다.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반면, 리와 기는 서로 분리되지 않아 '리기불상리(理氣不相離)'인데, 물질을 떠나 이치가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다.
문제는 맹자의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이 리기와 연결되면서 해석의 이견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사단은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이며, 칠정은 사람의 감정, 즉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이다. 사칠논쟁(四七論爭)은 사단칠정론을 두고 벌어진 성리학 논쟁을 말한다.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사단과 칠정이 리와 기 중에 어떤 것의 발현이냐는 것인데, 처음엔 이황과 기대승 사이의 논쟁으로 시작된 것에 율곡 이이가 자신의 의견을 내면서 점차 복잡한 국면이 된다.
성호는 이러한 학계의 분란을 정리하고자 <사칠신편>을 짓는다. 먼저 사단과 칠정은 배움(學)을 중심으로 구분되는데, 칠정은 배우지 않고도 능한 것(不學而能)인 반면에, 사단은 배우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非不學所能也) 했다. 때문에 퇴계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사단리지발, 칠정기지발을 지지한다. “공(公)이란 비록 나의 사사로움에 관계되지 않은 것이라도, 자기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리(理)의 역할이다. 리(理)는 능히 칠정으로 하여금 공(公)하게 할 수는 있으나, 칠정으로 하여금 사(私)에서 나오지 못 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소남은 이런 <사칠신편>에 동의한다며 스승의 주장에 힘을 싣는다. 그런데 이후 성호가 제자 신후담의 견해를 받아들여 내용을 일부 수정하며 「중발」을 저술하면서 논쟁이 시작된다. 「중발」에서 성호는 “성현의 기뻐함은 진실로 또한 순경의 인이 발한 것이며, 사람을 위해 성냄은 곧 역경에서의 수오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냄(怒)과 미워함(惡)은 글자는 비록 구별되지만 뜻은 서로 가까우니, 리발에 소속시켜도 또한 마땅하다.”라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사단뿐만 아니라 칠정도 이제 리발에 속하게 되었으며, 사단과 칠정은 모두 리발기수에 속하게 된다. 양명학과 교집합이다.
소남은 이러한 입장이 <사칠신편>과 모순된다고 지적하며 다시 한 번 리와 기의 분리를 이야기한다. 성인의 기쁨과 노여움은 인심이 자연스럽게 도에 맞은 것이니 ‘의리의 노여움’이 리발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본원이 기(氣)로부터 발현하였다는 것이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성호는 소남의 견해를 받아들여 「중발」을 삭제하기로 했지만, 끝내 거두지는 않는다.
송성섭 소남학회 연구실장은 이런 논쟁은 퇴계와 고봉의 논쟁보다 더욱 진척된 논쟁이라고 평가했다. 성리학 내부의 토론을 넘어, 성리학과 양명학 간의 쟁점까지를 다룬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소남의 성품에 대한 주변의 묘사, 세상으로 열린 소남의 다양한 관심사
백진우 서강대 교수는 소남이 세상을 떠난 후 그를 기리는 글들을 살피며 그에 대한 입체적인 관점을 가질 수 있는 단서를 제공했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자주 끼니를 굶으셨습니다 평소엔 성품이 너그러우셨으며 항상 좋은 얼굴을 하셨습니다 안회의 즐거움과 증삼의 반성이 오늘날 공에게 있었습니다. 해진 옷 입고 띠집에서 살며 단사표음으로 누항에 거처하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하여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학문은 심오함을 탐구하였고 행동은 올바른 법도 따랐습니다. 가난과 검소함 속에 자득하여 누항의 표주박도 기쁘게 여겼습니다.”
검소한 삶을 살며 진지하게 학문을 탐구하는 선비의 덕을 실천에 옮기려 했던 소남의 면모가 보이는 부분이다.
전성건 안동대 교수는 효와 예를 중심으로 향촌사회와 종가의 규범, 규칙을 정하고 공동체를 안정시키려 했던 모습을, 박혜민 연세대 교수는 『곤여도설(坤輿圖說)』 필사본을 통해 소남의 서학에 대한 열린 태도와 세계지리지를 통해 받았을 영향에 대해 살폈다.
발표에 이어 토론이 진행되었다. 각각의 발표에 토론자로 장진엽 성신여대 교수, 윤여빈 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 함영대 경상국립대 교수, 원재연 인천대 인천학연구소 연구원이 각각 참여했다. 소남에 대한 연구가 미진한 영역이 많은 탓에 구체적 사실 관계나 해석에 대한 이견 또는 수정 요청 등이 오갔다. 단어 선택 하나에 지적이 오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송성섭 소남학회 연구실장의 발표에 토론자로 참여한 윤여빈 전문위원은 "퇴계와 고봉의 논쟁이 주자학 범주라면 성호와 소남이 벌인 논쟁은 주자학과 양명학 사이의 논쟁으로 퇴계, 고봉의 논쟁을 능가하는 논쟁으로 보아야 한다"며 송성섭 연구실장의 의견에 동의했다. 또 성호와 소남의 사칠논쟁이 새롭게 정의되어야 할 소남학의 정의를 바로 할 뿐 아니라 성호가 '나의 도를 부탁할 곳이 있다'는 소남에 대한 인식이 성호학 학통의 계승자로서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네 시간 동안 진행된 낯설고 뜨거운 학술대회에서 자료집에 밑줄을 그어가며 열심히 강연과 토론에 참여한 어르신들이 많았다. 파평 윤문 종손들, 실학자들의 후손 모임, 남촌‧도림동 주민들도 참석했다. 죽는 날에도 인천사람이기를 바랬던 인천의 실학자를 알아가는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