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소통의 글쓰기
현재 우리나라가 잘 먹고 잘사는 나라지만 필자가 어렸던 1960~1970년대에는 먹을 것이 많이 부족했던 시대였다. 특히 시골에서 부농이 아니고는 먹거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대였다. ‘보릿고개’란 말도 생기지 않았는가?
필자 역시 가난한 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풍족하지 못한 가정이기에 아침은 콩 섞은 꽁보리밥, 점심은 고구마, 감자, 토란 등으로 때우고 저녁은 밀가루로 반죽을 만들어 칼국수, 수제비를 떠서 배를 채웠다. 그래도 이 정도만 먹어도 잘 먹고 사는 집의 축에 들었다. 그마저도 없을 땐 우물물로 허기진 배를 채웠던 기억이 난다.
학교 다니며 제일 곤란했던 것이 도시락이다. 도시락을 보면 잘사는 집과 못 사는 집의 판별이 바로 된다. 그래서 필자는 거의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질 않았다. 어머니가 제일 고민하시는 것이 밥도 밥이지만 반찬이었다. 부잣집 애들은 달걀부침에 생선묵, 고기반찬인데 난 매일 단무지나 콩자반이 주류였으니 그럴만도 하다.
어머니가 밥을 싸주시면 아무도 모르는 담벼락 밑에 숨겨 놓고 학교에 갔다. 오던 길에 꺼내어 먹었던 일이 태반이다. 혹여 도시락을 가져간 날은 반 애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 혼자서 얼른 먹어 치웠다. 어린 마음에도 꽁보리밥을 보이기 싫었던 모양이다.
학창시절을 보내고 군에 입대하여 삼시 세끼 꼬박 주는 밥을 먹으니 입대 전보다 훈련소를 나올 때 신체검사에서 몸무게가 10kg이 늘어 있었다. 얼굴은 길쭉했던 것이 동그래졌다. 다른 친구들은 ‘밥맛이 없네! 반찬이 어떻네.’ 하면서 잘 안 먹었다. 그러나 난 못 먹던 밥을 고스란히 먹게 되니 얼굴이 훤해졌다.
군에 입대하고 한 일 년이 지났을 무렵 선임 하사관이 자기 집에 도배하는 것 좀 도와 달라고 했다, 일요일 외출해서 나는 도배를 도왔다, 일이 끝나고 점심을 먹었는데 그 때 나는 보리나 콩이 들어가지 않은 밥을 처음으로 먹게 되었다. 잡곡밥이 아닌 새하얀 쌀밥을 본 것도, 먹어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다. 하얀 쌀로만 지은 밥이라니! 놀라웠다. 밥을 두 공기나, 많이 먹으면 세 공기까지는 먹어 봤는데 난 그날 다섯 공기를 먹고도 남의 눈치 때문에 숟가락을 놓아야 했다. 어찌나 밥이 술술 넘어가든지 씹을 겨를이 없었다. 황홀함 그 자체였다. 새하얀 쌀밥으로 뱃속이 차니 그제서야 ‘내가 촌티를 팍팍 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쉽지만, 밥상에서 뒤로 물러앉으니 선임 하사관이 “한 공기 더해, 밥 많이 있어” 한다. 무척 쑥스럽지만, 그냥 빙그레 웃고 말았다.
그때와 겨우 60여 년 차이밖에 안 난다. 지금은 뭐든지 너무 풍족해서 걱정이 될 지경이다. 쓰레기 분리 수거장에 가보면 옷에서부터 가구류, 가전까지 고장이 나서, 부서져서, 버려지는 것보다 유행에 뒤져서, 오래 입어 지루해져서, 새집으로 이사를 와서… 와 같은 이유로 너무 자주 새것으로 바꾸고 있다. 자본주의 나라에서 풍요롭게 산다는 데 누가 뭐라 하겠나. 너무 흡족해서 한편으로 불안해 지는 이 마음은 왜 이럴까. 이렇게 풍요롭게 잘 살다가 못 살게 되면 어떻게 될까? 한참 잘 나가던 필리핀, 아르헨티나 같은 나라들은 현재 왜 못사는 나라가 되었을까. 우리는 좀 더 자중해야 하지 않을까. 나의 이 오만가지 걱정도 쓰레기 하치장에 놓여진 저 쓰레기와 같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