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인천오페라단 황건식 단장 - 유동현 / 전 인천시립박물관장
2023년 10월 24일 오후 7시 서산시문화회관 대공연장, 지팡이 짚은 노인 한 명이 무대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청중들은 박수로 그를 맞이했다. 노인은 지팡이를 옆에 세워져있는 악보거치대에 걸어놓고 그랜드 피아노 옆에 섰다. 주름 진 얼굴, 백발에 흰 눈썹. 마치 산신령이 서있는 듯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피아노 전주가 흐른 후 노인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Om bra mai fu (나무 그늘 아래서/ 헨델의 오페라 ‘세르세’ 중)가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산신령은 간데없고 무대에는 ‘화통을 씹어 먹은’ 청년이 서 있었다. 오페라, 가곡, 찬송가 등 1, 2부로 구성된 ‘테너 황건식 열다섯 번째 독창회-황혼의 노래 VII’는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되었다. 그는 19곡을 불렀다. “앙코르∽” “브라보∽”
황건식은 1944년생이다. 올해 나이 80세다. 그는 여전히 무대에 서는 현역이다. 열다섯 번째 독창회는 척추염이라는 고질병으로 6개월간 병상에서 재활훈련을 하면서 선 무대였다.
50세에 떠난 이탈리아 음악 유학
황건식은 테너 성악가다. 그는 1998년 인천오페라단을 설립했다. 그에 앞서 1990년 ‘인천음악문화원’을 건립했고 이후 ‘인천소년소녀합창단’ ‘인천오페라합창단’을 연이어 창단했다. 이쯤 되면 그는 어렸을 적부터 체계적으로 음악 공부를 했고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했다. 학생 때부터 ‘목청’이 좋았다. 성악가보다 노래를 더 잘 불러 무대에 자주 불려 나갔다. 불혹의 나이에 성악 공부를 시작했고 내친김에 50세에 성악의 본고장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움베르토 보르소와 성악가 조수미를 지도한 발렌티니 등 당대 최고의 선생에게 성악을 배웠다. 4년간 전력투구한 후 귀국해서 1998년 고향 인천에서 오페라단을 창단하고 매년 그랜드오페라를 기획해 무대에 올렸다.
인천에서 간헐적으로 오페라 창단 움직임이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오페라단이 출범한 것은 인천오페라단이 처음이었다. 오페라를 사랑하는 10여 명이 모여 ‘인천오페라회’로 시작한 뒤 정식으로 오페라단을 출범시켰다. 대다수 단원은 인천 출신이었다.
인천오페라단이 출범하기 이전 인천에서의 오페라는 아주 생소한 장르였다. 1990년대 인천의 오페라 공연 풍경을 보자. 유일한 공연장이었던 시민회관은 당시 인천 최대의 공연 시설이었지만, 그야말로 다목적 공연장이었다. 인천시향, 시립합창단, 시립무용단 공연, 각종 민간 주최 공연이 같은 무대에서 치러졌다. 게다가 3·1절, 광복절 등 각종 기념행사도 열렸다. 공연장의 기본 조건인 음향, 조명, 무대 설비 등은 시내 예식장보다 나을 게 없었다. 가뭄에 콩 나듯 서울에서 내려와 무대에 올린 오페라 공연조차 이러한 시설 때문에 ‘망작’이 되곤 했다. 막이 내려지면 서둘러 세트를 다시 꾸미느라 두드려대는 망치 소리가 객석에까지 들렸다. 심지어 오케스트라가 없어 녹음을 틀어놓고 공연했던 시절의 ‘전설’도 전해진다.
오페라는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이다. 음악, 미술, 문학, 무대장치, 무용 등이 함께 어우러지는 종합예술로써 출연진과 스태프가 보통 몇 백 명이 필요하다. 기획부터 홍보, 공연까지의 과정이 만만치 않다. 워낙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오로지 민간 오페라단의 힘으로 완성된 작품을 올리기가 쉽지 않다. 1998년 창단 이후 황 단장은 매년 적지 않은 사재를 들여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다.
“겸허하게 마음을 비워서 젊은이들에게 소망을 품도록 하고, 아름다운 세상의 메시지를 노래를 통해 남겨주고 싶다.”는 신념과 열정으로 밀고 왔다. 창단 당시 인천의 문화예술 분야는 ‘불모지’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암울한 분위기였다. 그는 서울의 종속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인천만의 오페라 문화를 일궈내고자 했다. 오페라를 통해 인천을 예술의 도시로 키워보겠다는 의지로 자신의 남은 삶을 통째로 바쳤다.
황건식의 음악 DNA는 인천중학과 제물포고(7회 졸업)에서 조금씩 배양되었다. 1954년부터 인천중학교, 제물포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한 성악가 양윤식(1927~2009)의 구술을 통해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제물포고등학교 길영희 교장 선생님은 예체능 교육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셨어요. 학생들이 문화예술 프로그램으로 주도하는 학생 조회도 열고 합창대회 같은 음악 프로그램도 있었고요. 다른 학교와는 다르게 제물포고등학교는 음악 수업도 2시간을 연속해서 배치했어요. 악보 보고 노래하는 시창, 계명으로 노래하는 코뤼붕겐(Chorbungen), 발성법, 멜로디 창작법 같은 것도 가르쳤으니까요. 그래서 예술고등학교는 아니었지만, 학생들이 음악적인 감수성도 키울 수 있었고 예술적인 감각도 출중했었어요. 도 교육위원회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계속 지적했지만 길영희 교장 선생님이 설득해서 관철시켰어요. 그런 경험들이 나중에 음악을 전공하고자 하는 학생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해서 경기음악학원을 열게 되었던 거예요. 제물포고등학교에서는 작곡가 김중석 교수, 작곡가 노봉식 같은 이들이 학교 음악 수업에서 기초를 공부하게 했고, 성악가 황건식은 서울대 농대를 나왔는데 중학교 때 수업에서 공부한 성악이 좋았대요. 나중에 혼자 이탈리아까지 가서 공부하고 왔어요.”(2006년 인천문화재단 ‘인천 문화예술원로 구술 채록’)
서둔야학의 등불을 다시 켜다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서둔로 166(서둔동 103-25)에 가면 ‘경기상상캠퍼스’라는 공간이 있다. 이곳은 예전에 서울대 농대 캠퍼스였다. 2003년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이 관악캠퍼스로 통합 이전하면서 버려진 공간을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해서 2016년에 문을 열었다. 총 대지면적 152,070㎡의 숲과 건물로 이루어진 캠퍼스 부지 한쪽에 특별한 표지판이 하나 세워져 있다.
“이곳은 1965년부터 1983년까지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과 수의과대학의 학생들이 수원 서부지역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야학활동을 하였던 곳이다. 서둔야학은 54년 서둔교회에서 설립한 성경구락부를 모체로 하여 탑동 마을회관, 농사원 등지를 전전하며 활동하다가, 1965년 당시 학생이었던 황건식 등의 야학 교사들이 성금을 모금하며 이곳 부지를 구입하고 교사와 학생들이 직접 건물을 설계하고 건축하였으며, 책상과 걸상을 직접 제작하여 사용하였고 매년 10~20명의 학생을 모집하여 중등반을 운영하였다. 상록수 정신을 계승한 야학 교사와 졸업생들은 현재 서둔야학회를 설립하여 사회 각 분야에서 사회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서둔야학회에서 서둔야학사를 발간하게 됨에 따라 이를 기념하고 당시의 학생활동을 기리는 뜻으로 이 표지판을 세운다. 2000년 6월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장”
표지판에 ‘황건식’이란 이름이 적혀 있다. 오페라단장 황건식은 잠시 미뤄두고 야학 교사 황건식을 이야기해 본다. 서둔야학의 학교 이름 ‘서둔(西屯)’의 유래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정조 22년 무오년에 정조대왕의 명으로 정약용이 화성(華城)을 짓고 나서, 성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둔토(屯土)를 설치했다. 화성 서쪽의 둔전(屯田)이라 ‘서둔’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조선말부터 서둔벌에서 농사를 짓고 종자 실험도 하던 곳인데, 일제강점기에 수원고등농림학교가 설립되었다. 이후 국립 경성대학으로 편입되었다가 해방 후 서울대 농과대학으로 편성되었다.
야학 터로서의 숙명인가. 서둔야학이 있던 곳은 일제강점기의 브나르도 운동(농촌계몽운동)을 주제로 한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무대가 된 지금의 안산 상록수역 근처의 샘골과 불과 십리(4Km) 남짓 떨어져 있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정규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던 시절,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가르치던 곳이 야학(夜學)이다. 서둔야학도 당연히 비슷한 맥락에서 시작됐다.
수원 서둔동 일대의 야학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의 전신인 수원고등농림학교의 조선인 학생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농과대학 학생들에 의해 서둔야학으로 그 맥이 이어졌다.
1954년 서둔교회 성경구락부에서 시작한 서둔야학이 장소를 전전하며 등불이 꺼져 있던 것을 1965년 당시 서울대 농대 농학과 학생이었던 황건식 등이 다시 심지에 불을 붙였다.
서둔야학의 교가는 ‘즐거운 나의 집’
”우리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다닌 것이 아니라 서둔야학을 다녔다.“
1960년대 중반에 활동했던 서둔야학 교사들이 하던 말이다. 그들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생보다는 서둔야학 교사로 살았다. 서둔야학 교실은 1965년에 건축됐다. 당시 뜻이 있던 교수에게 지원을 받거나 일일주점으로 막걸리와 맥주를 팔아 돈을 모았다. 그 돈으로 닭을 키우는 양계장 부지(165㎡)를 샀다. 목수와 미장이 부를 돈이 없어 손수 건물을 지었다. 시멘트를 사다 직접 벽돌을 찍어 소달구지로 나르고, 나무는 학장을 졸라서 농대 연습림에 있는 나무를 베어 시내 제재소에서 잘라 썼다. 아이들도 나섰다. 스무 살 안팎의 서둔야학 교사들과 열너댓 살쯤의 야학생들이 학교를 같이 지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고된 작업을 조금이나마 잊게 하려고 황건식은 ‘홈 스위트 홈’을 부르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학생들과 같이 부르던 노래였다. 자연스럽게 모두 함께 그 노래를 부르며 작업을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누군가 훌쩍거렸다. 순식간에 비감한 분위기가 되었고 교사와 학생들은 함께 울었다. 늦가을이라 날이 추웠고 일은 고됐다. 게다가 배도 고팠다. 무엇보다 모든 상황이 서글펐다. 선생님들과 제자들의 얼굴은 가을비와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홈 스위트 홈’은 서둔야학의 교가가 되었다. 10년 이상의 세월을 서둔야학의 교가로 불렸다. 글자 그대로 서둔야학은 그들의 ‘즐거운 나의 집’이 되었다.
처음에는 8만원이면 교사를 지을 수 있을 것으로 계산했지만 23만원이 들었다. 당시 대학 한 학기 등록금이 1만원 정도였다. 학생들의 뜻에 감복한 농대 목공실에서는 책상과 의자를 만들어줬다. 교실 3동이 지어졌고 그곳에서 매년 20여 명의 가난한 야학생들이 초등학교와 중학교 과정을 배웠다.
서둔야학은 말 그대로 밤에 공부하는 학교였다. 교사들은 매일 밤 10시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야학생들을 집까지 꼭 데려다주었다. 사방천지 빛 한 조각 없던 어두운 길의 등불이 된 것은 노래였다. 황건식은 ‘수선화’ ‘매기의 추억’ ‘등대지기’ ‘목장 길 따라’ 등을 농대 연습림이 떠나갈 듯한 목소리로 불렀다. 아이들도 그 노래를 따라 부르며 귀가했다.
황건식이 주도로 만든 교훈에도 ‘음악’이 들어갔다. 서둔야학의 교훈은 ‘1. 참을 사랑하자. 2. 시처럼 음악처럼 살자. 3. 우리나라, 우리민족을 사랑하자.’였다.
황건식은 서둔야학의 초대 교장이었다. 그는 서둔야학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부지 구입부터 학장 설득에 이르기까지 그가 맨 앞에 섰다.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황건식은 모범생이었다. 그런데도 대학원 진학을 할 때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가지 못했다. 순전히 서둔야학 때문이었다. 야학의 교실을 지을 때 그는 건축 현장을 책임지고 지켜야 해서 수업을 빠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F학점 몇 개 때문에 서울대 대학원을 가지 못했다. 훗날 이 사실을 알게 된 제자들은 선생님의 삶이 궤도 수정하게 된 것을 두고두고 마음이 아팠다.
딸기 팔아 야학 운영비 마련
당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는 블루 아트, 마라푼다, 연묵회, 기독학생회, 한얼, 거지회, 개척농사회, 서둔야학회, 성원의 집 등 요즘 동아리라고 부르는 써클이 몇 개 있었다. 황건식을 비롯한 서둔야학회 교사들은 개척농사회에서도 활동했다.
당시 수원 탑동 언덕에 일자로 길게 지어진 단층짜리 기와집이 개척농사단 회원들의 공동 숙소였다. 이곳의 주인은 큰 규모의 농장을 운영했는데 그는 자식이 없었다. 후에 이 건물을 개척농사단에 넘겨주었다. 1970년 개척농사단 회원들은 남의 밭을 빌려서 딸기 농사를 지었다. 학교 운영비와 아이들이 쓸 학용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야학생 중에는 그곳에서 낮에는 딸기 따는 일을 하고 밤에 야학을 다니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자 학생들이 지은 교실은 조금씩 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붕이 낡아서 비가 오면 천장에서 빗물이 떨어지고 추운 날에는 시멘트 블록으로 쌓은 벽 틈새로 찬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1972년 농대 연습림에서 딸기 농사를 하던 아주머니가 딸기밭을 통째로 싸게 빌려줄테니 딸기 장사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했다. 당시에는 딸기밭 소풍이 유행하던 때였다. 특별히 갈 곳 없던 시절이라 딸기철이 되면 회사야유회, 교회 야외예배, 데이트, 심지어 대학생 미팅도 딸기밭에서 했다. 특히 서울대 농대 딸기밭은 전국적인 명성도 있던 터라 손해는 보지 않으리라 생각되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교사들은 당번을 정해 토요일과 일요일 몇 주 동안 딸기 장사를 하여 적지 않은 수익을 냈다.
그 수익금으로 주말에 교실을 보수하기로 했다. 손수레를 수원역 근처에 끌고 가 그 돈으로 시멘트와 모래를 샀다. 비용을 아끼고자 교사와 학생들이 벽에 시멘트 반죽을 덧칠하고 어느 야학 교사의 하숙집 주인이 목수였는데 염가로 슬레이트 지붕을 얹혀주기도 했다. 주변에서 데이트하던 야학 선배들까지 합세해 이틀 예정했던 공사가 하루 만에 끝났다. 미장일을 해본 사람이 하나도 없어 덕지덕지 바르긴 했지만, 교실 벽은 오랫동안 풍파를 이겨냈다. 아무튼 딸기밭은 한동안 야학 운영에 큰 보탬이 되었다.
1966년 서울대가 주는 상록문화상을 수상한 서둔야학은 유신정권 이후 순수 야학운동에서 민중야학의 길로 접어든다.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서고 1980년 5월 17일 전국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몇몇 교사가 연행, 구속되며 큰 위기를 맞게 된다. 무엇보다 7월 30일 과외금지법에 따라 야학도 금지되었다. 결국 1983년 면면히 이어지던 서둔야학은 1,000여 명의 학생, 300여 명의 선생님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폐교가 되자 야학과 아무 연고가 없는 사람들이 교실 안에 칸막이 벽을 쌓고 연탄보일러를 놓고 살았다. 그러다가 옆의 목장과 연결된 전기가 끊기자 그들은 그곳을 떠났다. 방 안에는 버리고 간 가재도구 등이 나뒹굴었고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세월이 흐르자 창문과 출입문은 망가졌고 지붕도 내려앉았다. 오랫동안 을씨년스러운 폐가로 방치되었다.
2015년 6월 27일자 e수원뉴스에 실린 기사 중 일부를 보면 당시를 엿볼 수 있다.
‘겨울에 폐교가 된 듯 처마 밑의 벽에는 연탄난로의 함석 연통이 그대로 꽂혀있고, 떨어져 나간 방문 안으로 들어가 보니 천장이 너풀거리며 온갖 잡동사니들로 어지러웠다. 그러나 한 시절 이곳에서 젊은 그들이 가난을 딛고 배움에 목말라하며 열정을 불태웠을 것을 생각하니, 그 숨결이라도 들려올 것만 같이 가슴이 뜨거워 왔다.’
황건식은 가끔 이곳을 방문했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함께 부른 던 노래가 환청으로 들렸다. 가슴이 미어졌다. 2016년 그는 야학교를 수리 보존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주위에서는 기금을 마련해서 함께 해보자 했으나 그는 비용을 전액 부담했다. 벽과 천장을 수리하고 출입문과 창문을 새로 달고 지붕을 교체했다.
그의 뜻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그 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당시 서울대 농대 동문인 염태영 수원시장의 지시로 부근의 목장 자리가 시민 텃밭으로 탈바꿈하고 야학교 바로 옆에 주차장과 출입문이 생기는 등 주변이 깨끗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재건된 야학 교사는 연습림 수목과 어우러져 멋진 모습을 연출하게 되었다.
사랑 하나 그리움 둘
서둔 야학 스토리는 박제된 옛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서둔야학 출신 수필가 박애란에 의해 그 시절 이야기가 소환되었다. 1965년 이 학교에 입학한 박애란은 2019년 <사랑 하나 그리움 둘>이란 제목의 자전 에세이집을 냈다. 가난한 시골 소녀는 서둔야학에서 중등 과정을 마치고 후에 교사가 되어 경기도 안일여고, 평택여고 등에서 33년간 교사로 근무하다 퇴직하였다.
“한 분 한 분이 서울대학생들인 서둔야학 선생님들은 내게 최상의 교재였다. 사람을 좋아하고 호기심과 탐구심이 강한 내게 서둔야학은 최상의 교육 환경이었다. 철학이나 문학 또는 음악 등 궁금한 것은 못 참는 나는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선생님들께 쪼르르 달려가서 내 궁금증을 해결하곤 했다. 몇 십 분의 서둔야학 선생님들은 내 개인교수 역할을 충실히 해주셨다.”
그는 문학에 대한 감수성이 뛰어나신 분, 음악에 탁월한 능력을 갖추신 분, 철학을 사유하시는 분 등 집단 지성의 집합체인 서둔 야학에서 배움의 달콤함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고 회상하며 “지금껏 나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소녀 시절 만났던 야학 선생님들이고 지금도 삶의 감동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이들을 바라보던 선생님들의 눈에 흐르던 자애로움이다”라고 밝혔다. 그는 서둔야학을 한마디로 ‘내 영혼의 성지’이자 ‘동화의 나라’라고 정의했다.
서둔야학사를 연구한 서울대학교 이용환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서둔야학교는 우리나라의 그 어떤 정규학교의 교육보다도 더 값진 성과를 거두었다. 자신들을 냉대한 부모와 사회에 대하여 원망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을 길러 주었으며, 농촌에 철마다 달리 자라는 한 포기의 들꽃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마음을 길러 주었으며, 자신을 사랑해주고 가르쳐준 젊은 교사들에게 감사와 존경할 수 있는 마음을 길러 주었으니…”라고 기술했다.
가야산 숲에 울려 퍼지는 오페라 메아리
황건식 단장은 현재 충남 서산시 해미면 대곡리 거주하고 있다. 서울대 농대 농가정학과 출신으로 서둔 야학 교사였던 김영옥 씨와 백년해로하고 있다. 몇 년 전 가야산 기슭에 8천 평의 부지를 마련하고 ‘소무원(韶舞園)’이란 간판을 달았다. 자연 속에 휴식을 취하며 생활과 예술을 접목해 보고자 해서 마련한 공간이다. 궁극적으로는 오페라하우스를 짓는 청사진도 마련해 놓고 있다. 꽃 피는 봄 어느 날 그곳을 방문하면 우리는 노래하는 산신령으로 만날 수도 있다.
지난해 10월 서산시문화회관에서 열린 독창회의 제목은 ‘황혼의 노래 Ⅶ, THE SONG OF TWILIGHT’였다. Twilight는 사전적 의미로 ‘황혼’ ‘쇠퇴기’다. 다른 의미로는 ‘불가사의한’ ‘비밀스러운’라는 뜻도 있다. 음악에 대한 황건식의 열정은 참 불가사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