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기준법 무력화하는 ‘반도체특별법’을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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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기준법 무력화하는 ‘반도체특별법’을 반대한다
  • 노영민
  • 승인 2025.02.1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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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칼럼]
노영민 / 민주노총 인천본부 노동법률상담소

 

근로기준법 제50조(근로시간)

① 1주 간의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외하고 40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② 1일의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외하고 8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근로기준법을 허물어트릴 반도체특별법을 여·야·정이 밀어붙일 태세다. 주 52시간(법정노동시간 40시간 + 연장노동시간 12시간)도 모자라 반도체산업 고소득연구개발 노동자에 대해 노동시간 규제를 적용하지 말자는 여당의 법안 발의에 야당이 보조를 맞추는 모양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업계는 주 70~80시간 일하는 대만 TSMC와 경쟁하려면 규제를 풀어야 한다며 군불을 지폈다. 중도층 외연 확장을 위해 친기업·실용을 표방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반도체특별법 도입 의지를 거듭 확인하고 있다. 이 대표는 2월 10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특별한 필요 때문에 불가피하게 특정영역의 노동시간을 유연화하더라도 총노동시간 연장이나 노동대가의 회피수단은 허용하지 않는다”며 반도체특별법의 노동시간 한도 예외를 고집했다. 2월 11일에는 자신의 SNS에 “흑백논리에 익숙하다 보면 빨강이나 회색이 있는지 잊게 된다”며 “주 52시간제 예외를 검토하는 것은 노동시간 단축, 주 4일제 추진과 얼마든지 양립가능하다”고 썼다.

무척이나 유감이다. 우선, 논의의 출발선이 문제다. 노동시간 유연화가 논의될 때마다 ‘주 52시간 근무’를 기본 전제로 삼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한국의 법정 노동시간은 주 40시간이다. 다만 연장노동을 할 경우 주 12시간까지만 할 수 있다. 주 52시간 노동 자체가 예외적 상황으로 우리나라에 주 52시간 노동제는 없다.

근로기준법에는 이미 다양한 예외적 상황을 허용하는 유연노동제도가 있다. 6개월에 걸친 탄력노동제를 적용하면 특정주에 64시간까지 노동이 가능하다. 연구개발직 업무량에 따라 시업과 종업시간을 조정하는 선택노동제는 3개월 정산기간 동안 총노동시간만 지키면 특정주의 노동시간 한도 제한 없이 몰아서 일하기가 가능하다. 사용자의 필요로 특별연장노동을 노동부가 인가하면 개별 동의만으로 주 64시간 노동이 가능하다. 연구개발직은 기본 3개월까지 특별연장노동이 가능하고 사용자의 필요만 인정되면 인가기간이 계속 연장될 수 있다. 반도체특별법에 주 52시간 노동시간 한도 규제를 푸는 것은 이미 있는 예외에 이중 예외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재명 대표는 “‘(사용자 측이) 몰아서 일하기가 왜 안 되느냐’ 하니 할말 없더라”고 했다. “몰아서 일한 뒤 몰아서 쉰다고 해서 몸이 회복되지는 않는다”는 반도체 노동자의 말을 진지하게 들었으면 이런 말은 하지 못할 것이다.

반도체 노동자들은 이미 주 64시간까지 일할 수 있는 특별연장노동 등을 경험해봤고 지금도 하고 있다. 근무시간이 길어진다고 업무 효율이나 생산성이 오르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안다. 몰아서 일하고 나중에 쉬면 된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론 쉽지가 않다. 당사자 동의를 받는다지만 회사 분위기에 반하는 행동을 하기도 어렵다.

이러다 보니 매년 동료의 과로사·과로자살 소식을 듣는다. 과로의 위협은 생산직과 연구개발직 등 직군을 가리지 않는다. 과로사한 한 연구개발직 엔지니어의 유족은 “남편이 한 번도 업무용 노트북을 놓아본 적이 없고, 10년이 넘는 동안 가족여행을 딱 한 번 했는데 그때도 노트북을 가져갔다고”고 말했다.(경향신문 2025.2.11.)

최근 4년 동안 삼성전자에서 일하다 뇌심혈관계 질병을 얻어 산재를 신청한 노동자 중 절반이 연구개발직이었다. 뇌심혈관계질병은 과로노동이 원인인 대표적 질병이다. 특히 삼성전자가 주 52시간을 넘는 근무를 시킬 수 있는 특별연장노동 인가를 잇달아 받은 뒤 뇌심혈관계 산재신청이 급증했다. 반도체산업 연구개발 노동자들이 이미 과로에 내몰려 아프거나 죽고 있고, 특별연장노동 제도가 도화선이 된 것이다. 삼성전자는 노동부로부터 2021년 5건, 2022년 1건, 2023년 7건, 2024년 26건의 특별연장노동 인가를 받았다. 이 기간 뇌심혈관계 산재신청은 2021년 2건, 2022년 1건으로 1~2건을 유지하다 2023년 0건, 2024년 3건으로 증가했다.(박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박해철 의원이 입수한 삼성전자 노동자 산재신청에 대한 근로복지공단 판정서에는 반도체산업 연구개발 노동자들이 사망하기 전까지 겪었던 과로의 흔적이 남아 있다. 연구개발 임원 직급인 마스터로 승진한 뒤 급격히 노동시간이 증가해 발병 전 12주 동안 주당 평균 61시간을 근무하다 사망한 노동자의 유족은 고인이 오전 6시 전에 집에서 출발했고, 평균 11시간 이상 회사에서 일하다 오후 10시 이후에야 퇴근했다고 진술했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퇴근 이후나 휴일에도 업무를 이어 나가다 건강검진을 마친 뒤 복귀하다 의식을 잃어 병원에서 사망한 연구개발 노동자의 유족은 고인이 퇴근 후 또는 휴일에도 업무 관련 서적을 검토하고, 연구논문을 검색했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반도체특별법에 노동시간 특례를 밀어붙인다면 이는 특별법을 통한 노동시간 규제 완화의 선례가 된다. 도미노처럼 반도체산업만이 아니라 다른 산업에도 노동시간 규제를 풀어달라는 요구가 빗발칠 것이고 근로기준법의 노동시간 규제는 무력해질 것이다. 몰아서 일하기의 종착점은 노동자의 죽음이 될 것이다.

근로기준법의 노동시간 규제를 무력화하고 장시간 노동과 노동자의 죽음을 가져올 반도체특별법을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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