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 ‘소환’하는 후보들에게 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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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 ‘소환’하는 후보들에게 고함
  • 이영주
  • 승인 2012.11.28 0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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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칼럼] 이영주 / 인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한국비보이연맹은 25일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지금 대선후보들이 표를 의식해 이런 저런 말씀들을 많이 하고 있지만 이미 한류문화 콘텐츠로 자리잡은 비보이를 지원하는 데는 인색하기만 하다”며 “그런데 박 후보가 ‘비보이와 대한민국 고유 문화콘텐츠의 융합’과 ‘비보이 저변확대’ 지원 등을 약속했다. 우리는 박 후보의 약속을 믿는다”고 밝혔다.

- 11월 25일자 뉴스 기사

“수많은 비보이들이 한 목소리를 내어 박근혜 지지 선언을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오랜 시간 많은 것을 포기하고 꿈, 열정, 자존심을 지키며 스트리트 댄스 문화를 발전시켜온 예술가들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

“논란이 된 기사의 사진에 배경이 된 비보이들도 처음에는 단순한 공연목적으로 섭외 후에 온갖 회유를 통해 당일 기자회견 전문을 발표하는 자리 뒤켠에만 자리 잡고 있어달라고 요구했다. 그 기자회견 내용 자체도 전달받지 못했다”

“비보이들이 연맹 총재와 그 산하의 정치놀음에 희생양, 피해자가 된 것 같다. 총알받이로 아무것도 모르는 비보이들을 세워놓고 이용 좀 해먹겠다는 것”

- 스스로 비보이라 밝힌 네티즌들의 트윗

어제는 ‘비보이연맹’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단체가 각종 포털 뉴스와 SNS를 뜨겁게 달구었다.

비보이야 브레이크댄스를 추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니 그렇다 치고, 비보이들이 연맹을 만들다니 참으로 생경하기 그지없었다. 거리의 춤꾼 비보이에게 함께 춤을 추기 위한 크루(crew, 동아리) 정도의 소규모 모임도 아니고 유도연맹, 축구연맹처럼 운동경기에나 어울릴 법한 어마어마한 ‘연맹’이라니? 도무지 상상 가능한 조합이 아니었다. 거기다 한 술 더 떠 비보이연맹이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인 박근혜 후보 지지선언을 했단다.

역시나 이 뉴스는 거센 논란에 휩싸였다. 실제 비보이연맹이라는 단체는 올해 2월 출범한 따끈따끈한 조직. 보통 비보이 하면 떠올리게 되는 10대, 20대 청년들이 아니라 출범행사에 참여한 회원들은 대다수가 중년, 노년층이었고 유정복, 노철래, 김선동, 홍준표 의원 등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의 축하 화환이 그 자리를 빛냈다. 공식 홈페이지는 한 포털사이트의 카페로, 기자회견 당시 카페 회원 수가 고작 37명이었다.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선거용으로 급조한 단체라는 혐의를 지우기 어렵다.

당사자인 비보이들이 비분강개하고 나섰으니 그 사실관계야 조만간 밝혀질 것이라 생각한다. 궁금한 것은, 박근혜 후보 측이 왜, 이렇게 24시간도 안 되어 사실관계가 밝혀질 것이 뻔한, 그럴 경우 선거에 오히려 악영향을 끼칠 것이 뻔한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비보이를 ‘소환’했는가이다.

격렬한 춤을 추는 비보이들은 누가 생각하더라도 젊음과 자유의 상징이다. 박근혜 후보는 비보이연맹이라는 매우 어울리지 않는 단체를 만들어서라도 젊은 유권자들을 지지자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다소 나이든 느낌이 나는 여당 대통령 후보의 고뇌가 느껴진다.

그러나 이런 뻔하디 뻔한 ‘동원’은 군사독재 시절에나 통하는 방법이다. 지금의 20대가 어떤 세대인가? “88만원 세대(20대 비정규직이 받을 수 있는 평균임금)”에 이어 “3포세대(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그들을 과거의 낡은 방식으로 ‘소환’하는 것은 가뜩이나 크게 난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디 청년뿐인가. 박근혜 후보 측은 청년과 더불어 여성도 소환한다. 선거용 포스터에 아예 대놓고 “준비된 여성대통령”이라는 슬로건까지 걸었다. 박근혜 후보를 공개 지지한 ‘오적’의 시인인 김지하는 26일 시국강연을 통해 “이제 여자가 세상 일 하는 시대가 됐다”며 “여자 세상 한번 그려보라”고 말했다.

여자, 여자, 여자……. 여성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입장에서 자꾸 여자를 소환하니 신경을 쓸 수밖에 없긴 한데, 박근혜 후보가 여성인 것만으로 ‘여자가 세상 일 하는 시대’나 ‘여자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급조한 비보이연맹으로 청년세대의 지지선언을 연출하는 것 만큼이나 억지스럽다. 지금 한국의 여성은 또 어떤가. 알파걸이니 각종 고시 상위권을 차지한다느니 세상이 변했다고 하지만, 여성 대다수는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약 70%가 여성) 더구나 결혼과 임신, 출산, 양육으로 이어지는 생애주기를 가질 수밖에 없는 여성은 유연하기 짝이 없는(!) 노동시장에서 가장 자르기 쉽고 다루기 쉬운 먹잇감이다. 점점 높아지는 자녀 양육과 교육 비용을 감당하려면 자녀 양육과 더불어 경제활동도 해야 하는데, 출산과 양육으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이 갈 수 있는 일자리란 불안정한 저임금 노동뿐이다.

이런 여성들에게 과거 18년 대통령직을 장기집권한 아버지의 딸인 여성후보가 줄 수 있는 동질감은, 희망은 무엇일까? 이 역시 생채기에 소금 뿌리는 짓이다.

박근혜 후보를 반대하는 쪽에서도 아무 때나 여자를 불러들이는 것은 매한가지다. 박근혜 후보나 그 후보가 속한 정당, 그 후보의 정치적 태생에 대해 비판할 것들이 무수히 많을 텐데도 불구하고, 가장 손쉽게 가져다 쓰는 재료는 박 후보가 여자라는 사실이다. 말로, 그림으로 끊임없이 여자를 소환해 박 후보를 비난한다. 여자가 아니었다면 결코 듣지 않았을 비난을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박 후보는 들어야 한다. 박근혜 후보에 대한 지지를 호소할 때도 비난할 때도, 여자는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소환 당한다.

청년, 여성은 지금 한국사회의 대표적 소수자이다. 여기서 소수라 함은 그 수가 적다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권리로부터 배제된 이들이란 의미다. 소수자가 갑자기 인기가 있을 때는 선거 때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당이고 야당이고 가릴 것 없이 소수자를 소환하는 것은 이미 선거운동의 기본이 되어 버렸다. 시도 때도 없이 불러내고 맥락도 없이 억지춘향처럼 끼워 맞춰 지지를 호소하거나 타 후보를 비난하는데 이용한다. 이것은 가뜩이나 소외되고 상처 입은 소수자들을 두 번 죽이는 꼴이다.

더 이상 우리를 소환하지 마라. 소수자들은 필요할 때면 아무 때나 갖다 붙였다가 쓸모가 끝나면 가차 없이 버리는 대X밴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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