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 안타까움과 인간적인 연민, 그리고 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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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 안타까움과 인간적인 연민, 그리고 위무
  • 조혁신
  • 승인 2013.06.09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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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진보의 꿈-조봉암 평전>저자 소설가 이원규를 만나다
<인천in-문화매거진 옐로우 협약기사>
 
인터뷰 - 조혁신(소설가, 인천일보 문화부 차장. 소설집으로 <뒤집기 한 판>, <삼류가 간다>가 있다)
 
인천 출신의정치지도자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지닌 진보당을 창당한 후 이승만 정권에 의해 간첩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당한 비운의 정치인 죽산조봉암. 조봉암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룬 <조봉암평전 - 잃어버린 진보의 꿈>(한길사)을 출간한 소설가 이원규를 만나 죽산의 생애와정치사상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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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죽산조봉암이라는 이름은 지난 50년 동안 금기시되었고, 철저히 잊혀졌다. 박헌영, 김단야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창당하며 항일 독립운동을전개했으며, 해방 후 초대 농림부장관을 지내며 토지개혁을 이끌고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던 거물 정치인이었던 조봉암이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하게 된원인은 무엇이고 이후 대법원의 재심 무죄판결까지 50년 동안 우리 역사 속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이 무엇인지 몹시 궁금했다.
 
작가는 죽산에 대한얘기를 단도직입적으로 꺼내놓지 않고 멀리 에둘러간다. 죽산에게 다가서게 된 배경부터 천천히 설명했다.
“쓰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나 스스로 왜 쓰냐고 물어볼 때가 있었어요.누가 쓰라고 해서 쓴 게 아니잖아요? 답은 두 가지였어요. 하나는 열정을 바쳤으나 뜻이 꺾인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과 인간적인 연민. 또 하나는위무(慰撫). 지금은 인천 출신 정치적 거물이 없잖아요. 그래서 정치적으로 인천이 홀대 받지요. 인천 출신 비범했던 인물 죽산에 대한 위무말이지요. 죽산 선생은 인천이 낳은 현대사에서 가장 큰 인물입니다. 여러 해 전 내 소설이 약발이 떨어졌다는 생각이들었어요. 작가로서는 슬픈 일이지만 내가 최고로 좋았던 소설, 이제 그것보다 더 좋은 소설을 쓸 수 없다고 느낄 때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다른 쓸 길을 찾다가 인물에 대해 쓰기 시작했어요. 민족주의 진영 독립투사들은 충분히 조명되어 있다 생각해서 사회주의 독립투사라 역사의뒤안길에 가려져 있던 김원봉과 김산 평전을 썼고 비교적 괜찮은 평가를 받았어요. 이 자리에서 처음 밝히는 얘긴데, 20년 전인가 새얼문화재단지용택 이사장님이 박두성 선생 평전을 쓰라고 권유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죽산을 쓰라면 쓰겠다고 했지요. 어쩌면 앞서 평전 두 권을쓰면서 우리나라 항일 독립운동사 맥락과 공산주의 운동을 파악했던 것이 죽산 평전을 쓰기 위한 무의식적인 예비였던 것 같아요.”
 
우연인지 필자는 이원규 소설가가 언급한 김원봉 평전과 김산 평전 두 권을 모두 읽은 바 있다. 이원규 소설가는 만주일대에서전개되었던 항일무장투쟁을 다룬 대하소설 <거룩한 전쟁>과 <누가 이 땅에 사람이 없다하랴>를 썼다. 그는 소설을 쓰려고오랫동안 현장답사와 독립운동사, 공산주의운동사를 연구했다. 약산 김원봉, 김산 그리고 죽산 조봉암 평전 저술은 이원규소설가가 작가로서 화두로 붙잡고 있었던 항일 공산주의 독립운동사 탐구작업의 연장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죽산 조봉암을 재조명하는 이유가 단지 연민과 위무 때문이었을까? 이원규 소설가는 명쾌하게 덧붙였다.
 
“죽산 선생은 강화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정치적으로 성장한 인물입니다.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온몸에 담고 있는 분이나 마찬가지고 현대사를 온몸으로 헤치고 나온 사람이 여운형도 있고 여러 사람이지만, 이분이야말로 한국 현대사를 그대로 상징하고 있어요. 우리가 오늘날 누리고 있는 부와 넉넉함 외에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가치인 모두가 평등하게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희구했던 하는 분이지요. 내가 책 서문에서 그가 마치 순교자나 선구자처럼 보인다고 했어요. 죽산을 쓸 때, 나는 죽산을 쓰기 위해서 작가가 된 거 같았어요. 이 평전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잘못된 생각이지만 그게 에너지를 주잖아요. 그리고 우리 고향 인물인 조봉암에 대해 내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심경으로 쓴 거예요.”
 
얘기를 듣다보니 그의소설가로서의 이력을 잠시 떠올리게 되었다. 그는 장편 <황해>을 비롯한 1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통해 분단문학의 지평을 넓혔다는평가를 받았다. 특히 인천 서해를 무대로 한 소설 작업에서 인천이 우리나라 현대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있었음을 밝히기도 했다. 어쩌면 그의말대로 <조봉암평전> 작업이 정치적으로 소외된 인천에 대한 위무이자 인천을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중심에 놓는 일련의 과정이었구나 하는생각을 해본다.
 
조봉암은 고향 강화의 3.1만세운동에 참가해 고문과 옥고를 치르고 일본 주오(中央)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치열한 독서와 토론으로 사회주의 사상에 젖어들고 그리고 베르후네우딘스크 연합대회국내대표로 선정돼 모스크바에 가고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며 급격하게 공산주의자가 된다. 조봉암이 왜 공산주의에 빠져들었고 그걸 통해서무엇을 이루려고 했고 이후 공산주의에서 중도주의 정치사상을 가지게 되었는지 가장 궁금한 대목이었다.
 
“내 생각은 그래요. 3.1 운동이 민족적 각성을 이뤘지만 실제적으로 이룬 게 없단 말예요. 절반의 실패죠. 우리는 수천 명이 죽거나 다쳤는데 일본 헌병이나 경찰은 부상이 20명밖에 안된다니까. 이게 뭐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안 된다. 파리 강화회의가 3.1운동 전후하여 열렸는데 서구 열강은 아무도 우리를 돕지 않았던 거예요. 그 당시 일본 유학파들의 상당수가 우리의 살길은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으로는 어렵다고 깨달은 거예요. 세계사적으로는 러시아에서 공산주의혁명을 성공시켰는데 바로 저거다 하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래서 그 당시 지식인들은 독립을 위해서 부르주아 민족주의보다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로기운 거예요. 그러니까 죽산이 선택했던 것도 유별난 선택이 아니었던 겁니다. 시대적 흐름에 따라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든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죽산은현실성과 적응력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어요. 죽산은 일본 주오대학 1년밖에 안다닌 사람인데 난다 긴다 하는 진보주의들 중에서 코민테른 회의에대표로 발탁된단 말예요. 얼마나 말을 잘하고 설득력이 있으면 코민테른 대표 부하린에게 발탁이 돼서 공산주의대학에 입학하게 되잖아요. 신념이나확신이 없으면 못할 것이거든요. 타고난 재능도 있겠지만, 부하린과 같은 거물을 사로잡는 능력도 있었던 거예요. 나중에 국회에 진출한 다음에도돈도 없고 조직도 없는 사람이 정치 지도자로 떠오르게 되는 것도 그런 현실감과 상대를 사로잡는 조직 감각이 바탕이었던 겁니다. 결국 그 양반의인간적 역량하고 공산주의가 딱 맞았던 게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그분은 공산주의를 위한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던 거 같아요. 왜냐면 결국 나중에 공산주의를 버리게 되잖아요. 물론 타의적으로 버린 측면도 있어요. 동료들에게 비판받는 여러 가지 외부적 상황들도있었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이 있었다면 안 버렸을 거잖아요. 죽산은 공산주의를 독립운동의 수단으로 생각했으니까 공산주의를 버릴 수 있었던거예요. 해방 이후에도 민주주의독립전선을 이끌어 정치를 한 거 보면, 나쁘게 얘기하면 실리를 찾은 현실주의자였던 거죠. 비판론자들이 죽산 인생에서 가장 오점으로 지적하는 남한 단독정부 지지 말이에요. 그런데 단독정부가 안 섰으면 어떻게 되냔 말예요. 소련하고 미국이 분할 점령하는 상황인데 김구 선생도 단독정부 하자고 주장하다가 암살당하고 여운형도 암살당했잖아요. 그런데 김구나 여운형 선생보다는 죽산은 더 현실적이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공산주의를 버린 거 같아요.”
 
이원규 소설가의 말에따르면 죽산은 정치 감각이 뛰어나고 현실주의자이란 생각이 든다. 죽산은 일본 유학 중 공산주의에 경도되고 시베리아를 건너 러시아 모스크바까지가는 선택을 신속하게 내리면서 발 빠른 행보를 보였다. 해방 직후 좌우대립, 남북대립, 냉전질서 속에서도 죽산은 다른 정치 지도자와는 달리유연하고 폭넓은 행보를 보인 게 이를 뒷받침한다. 그런데 이런 현실적이고 대중적이며 비범한 그의 정치적 능력 때문에 이승만은 그를농림부장관으로 발탁한 게 아니었을까? 결국엔 죽산이 농지개혁을 성공시키며 국민적 지지를 받고 대통령후보로 출마까지 하게 되며 이승만 정권에위협이 되어 이승만이 그를 제거하게 되었다.
 
“당시 거물이었던 김성수나 죽산의 친구였던 장택상, 이분들은 대표적인 지주 출신,부르주아 출신이지요. 이분들이 농림부장관이 되어서 토지개혁을 했다고 가정을 해봐요. 이 사람들도 중국이 공산화된 것도 농지 문제 때문이란 걸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농지개혁을 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죽산처럼 평생 좌파 딱지를 받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죽산이 한농지개혁은 눈부시게 빛나는 공인데 지금도 죽산을 이해 못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거예요. 그게 죽산의 운명적인 비극예요. 원죄 같은 거예요.”
농지개혁은 해방 이후남북 양측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현안이었다. 북한은 지주의 토지를 몰수해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는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남한은 여전히소수의 지주들이 토지를 독점하고 있었다. 이원규 소설가는 당시 이승만 정부가 농지개혁을 하지 않았다면 남한은 농민들의 봉기로 쉽게 공산화되었을거라고 말했다.
 
“원내 다수당인 한민당은 상당 부분이 지주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자기 재산이 박탈될 거 같아 농지개혁을 반대했어요. 죽산이 그걸 뛰어넘어 농지개혁안을 밀어붙이지 못했다면 3년 뒤 한국전쟁이 났을 때 농민들이 북한에 동조했을지도 모릅니다.”
죽산은 농지개혁 성공을기반으로 1952년 2대 대통령 선거와 1956년 3대 대통령에 출마해 이승만과 경쟁을 한다. 선거에서 차점자로 고배를 마셨지만 죽산의중도주의 진보노선이 이미 진보당 창당 이전부터 지지를 받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이원규 소설가는 당시 분단과 전쟁의모순을 해결할 사람으로 죽산이 지지를 받은 것으로 해석한다.
“죽산의 평화통일 정책이 지지를 이끌어낸 것이지요. 당시 국민들은 전쟁과 분단체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어요. 이승만의 북진통일 무력통일론으로 또 다른 참극이 벌어지는 걸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통일을 지향한 죽산이 지지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국민들의 지지가 결국 죽산을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이원규 소설가는 죽산의평화통일 노선에 특히 주목했다. 죽산의 평화통일 노선은 이승만의 북진 무력통일 노선과는 정반대의 노선이기도 했다.
 
“죽산과 진보당의 평화통일 노선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죽산의 미래 청사진이 우리 민족의 번영의 최선의 길이었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리고 진보당 창당 정신, 진보당이 내놓은 교육, 노동 등 정책이 국민들에게 호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이었으면 충분히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성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미국은 메카시즘 열풍과 반공주의가 득세를 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국내정치 미국의 반공주의관계속에서 진보주의가 발현되지 못했던 상황입니다.”
일제강점기 7년 동안옥고를 치르고 인천에서 사업을 하며 칩거를 하던 그는 해방을 맞이하며 정치 전면에 나서지만 과거 공산주의 동지들과 우파 인사들 양쪽으로부터비난을 받는다. 해방 직전 일제와 협력했다는 의혹에도 시달린다. 그 과정에서 조봉암은 인천 출신 좌우익 인사들을 폭넓게 만나며 그의 진보주의정치이론의 초석을 다진다. 정치적 고향 인천에서 삶은 어떠했을까? 죽산의 인천에서의 정치 활동을 따라가다 보면 인천 현대사의 커다란 한 부분이드러난다.
 
“죽산은 삼일운동 직후 인천 출신 박남칠과 가장 먼저 교유했어요. 돈이 없어서YMCA 중학부를 다녔는데, 거기서 만났습니다. 이 분야는 인천의 소장 향토사학자 이성진 선생의 논문이 있어요. 박남칠은 인천 사람이지만 아버지가 양곡업계의 거물이었고, 강화친목회, 강화학회 등을 이끌던 김용규 선생도 양곡업계 실력자였지요. 그들은 인천의 사회주의 운동 그룹이었는데 죽산은 그런 인연으로 그쪽과 연결이 되었던 걸로 보여요. 죽산은1939년 출옥해서 인천으로 왔습니다. 해방 후에는 그 외에 중도파나 우파 쪽 명망가였던 신태범 박사랑 친했습니다. 인천시세진흥회에 참여하게되면서 우익 쪽에 처음 발을 딛게 됩니다. 시세진흥회에 가게 된 게 공산주의만이 아닌 좌우 합작 정치가 필요를 하면서 현실적인 판단을 하게 된걸로 봐야 합니다.”
죽산은 1959년처형당한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죽산의 비운은 생명이 꺼진 후에 오히려 심화된다. 2012년 11월 1일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으나무려 50년이란 긴 세월동안 죽산은 역사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그리고 지금도 그의 독립운동 경력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죽산이 역사에서망각된 이유는 무얼까?
“국가가 대법원에서 판결한 사건을 번복하기 힘들었겠지요. 아마 소련과 동유럽 등 공산주의 블록이 붕괴된 이후에야 죽산에 대한 재심이 가능해진 거 아니겠어요? 박정희 정권 시대도 철저하게 반공을 국시로 하는 때였고. 진실?화해위원회가 만들어진 이후에나 복권이 시도된 거죠. 올림픽도 치르고 경제력도 커지고 세계 10위 경제력에 국격도 올라가고 하니까 이제는 죽산에 대한 복권 작업이이뤄진 것이죠. 이제야 국가 양심을 회복하는 쪽으로 갔다고 봐야합니다. 우리 고향 인천에서 선배님들 중 내가 죽산을 쓰는 걸 걱정하고 반대하는분들도 있었어요. 증언하며 자료를 주시고 도와준 분들도 있지만 반대편 선 사람들이 그래요. 그냥 맹목적으로 죽산을 비난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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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규 소설가는 대법원재심 무죄판결로 죽산이 명예를 회복했으나 아직도 그의 사상이 맹목적인 반공주의 때문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죽산의 정치적고향 인천에서도 죽산 재조명 움직임에 대해 반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죽산의 명예회복에 제일 먼저 앞선 게 새얼문화재단이죠. 심포지엄도 여러 번 하고 <황해문화>에 죽산 관련 원고도 많이 실었습니다. 무죄 선고를 받는 순간부터 동상 건립 모금 운동을 했어요.모금 광고 기사 한 번도 안 나갔는데 동상 건립 기금이 8억 정도 모였다고 해요. 우리가 옛날에는 몰라서 지켜주지 못한 인물인데 우리가 기념을해줘야할 거 아닌가 그런 이유죠. 그런가 하면 아직도 죽산에 대한 북쪽에서 월남한 사람들 공산주의에 대한 염증이나 분노를 가진 분들, 죽산에대한 이해를 잘 못하는 분들 반대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직도 죽산 재조명은 조심스런 부분이 있는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인천시와 시민들의 죽산 재조명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어찌 보면 이원규 소설가의 <조봉암평전>은 죽산 조봉암의잃어버린 진보의 꿈을 다시 밝히는 작업일 것이다.“우리가 못한 일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후배들이 해나갈 것이네. 결국 어느 땐가 평화통일의날이 올 것이고, 국민이 골고루 잘 사는 날이 올 것이네. 나는 씨만 뿌리고 가네.”라는 죽산의 옥중 유언은 오늘날에도 섬광처럼 남아 있다.
 
이원규는 인천의향토사학자였던 고(故) 이훈익 선생의 아들이다. 인천고, 동국대 국문과를 나와 1984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1986년 <현대문학> 장편소설 공모에 베트남 참전 경험을 쓴 <훈장과 굴레>가 당선되었다. 창작집 <침묵의섬>, <깊고 긴 골짜기>, <천사의 날개>, 장편 <훈장과 굴레>, 대하소설 <누가 이 땅에사람이 없다하랴>를 발간했다. 사회주의 독립투사들의 발자취를 찾아 20여 차례 중국과 러시아를 답사했으며 르포르타주 <독립전쟁이사라진다>, <저기 용감한 조선 군인들이 있었소>, 평전 <약산 김원봉>, <김산 평전> 등을 출간했다.대한민국문학상, 박영준문학상, 동국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모교인 동국대 겸임교수로 10여 년간 소설을 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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