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냉전 초기(1945-1953년) 미국의 대외정책과 기독교 (2)
상태바
[특별기고] 냉전 초기(1945-1953년) 미국의 대외정책과 기독교 (2)
  • 최태육 목사
  • 승인 2015.02.16 00: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절반의 성공, 트루먼의 반공종교동맹

트루먼이 대소련 봉쇄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반공종교동맹에 찬동한 교황 피우스 12세

트루먼의 정치신학은 소련 봉쇄정책의 이념적 토대가 된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 세계 종교단체를 규합하여 이들을 봉쇄정책의 도구로 사용하고자 했다. 즉 반공주의자들을 강화시키고 이를 토대로 공산주의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방법으로서 종교를 활용하고자 했다. 즉 미국 연방교회협의회, 세계교회협의회(WCC), 교황청, 동방정교회, 유럽의 개신교들과 협력하면서 반공종교동맹(a religious alliance against communism)을 조직하고자 했다. 트루만과 함께 이를 주도한 사람은 미국 성공회의 영향력 있는 평신도이자 미합중국 철강회사의 중역이었던 테일러(Myron Taylor)였다. 1947년, 트루먼과 교황 피우스 12세(Pope Pius XII)는 테일러를 통해 편지를 교환했다. 트루만은 천주교회가 반공종교동맹에 참여해주기를 호소했고, 교황은 이에 동의했다.

이런 상황에서 테일러는 1947년 뉴욕에서 미국 연방교회협의회(FCC) 주요 인사와 1948년 WCC의 주요 인사를 만나 천주교의 반공종교동맹의 참여를 타진했다. 1947년 10월 2일 연방교회협의회의 맥크레(Samuel McCrea)와 감리교 감독 옥스남(Bromley Oxnam), 북침례교의 델버그(Edwin Dahlberg), 그리고 장로교의 푸(William Pugh) 등 미국의 종교지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테일러는 소련의 팽창을 봉쇄하기 위해 지정학적으로 이탈리아가 중요하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과 다른 유럽의 개신교 지도자들이 반공종교동맹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렸다.
 
1947년과 1948년 유럽의 상황은 미국 정부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공산당원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었고, 이것은 미국으로 하여금 공산주의자가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1940~1945년,프랑스와 이탈리아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공산당원의 수는 꾸준하게 늘다가 종전 직후 큰 폭으로 상승했다. 예를 들어 체코슬라바키아의 경우 1945년 5월에 2만 8000명이었던 공산당원 수가 9월에는 75만 명으로 늘어났는데, 이는 소련군이 체코를 강제하기 이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1947년 11월에 공산주의자들은 일련의 총파업으로 프랑스 정부를 무력화 하였다. 이탈리아 공산주의자들은 선거를 통해 통치권을 획득하려는 듯 보였다. 12월에 루마니아는 친 소련 정부가 구성되었다.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중국정부를 무력화하면서 전역을 공산화하고 있었다. 1948년 새해 벽두에 체코슬로바키아는 친소내각을 구성했다.

미국 정부는 프랑스·서독 등 서유럽, 이탈리아·그리스 등 남유럽, 체코·유고 등 동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8년 봄 전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배제하지 않았다. 3월 5일 해군장관 포레스털은 베를린 주재 미국인 부영사 우시어스 D. 클레이 장군이 육군 정보부에 보낸 비밀 전문, 즉 “지난 수주일 동안 나는 소련의 태도에서 미묘한 변화를 느꼈는데,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제 그들의 태도에서 매우 급박하게 쳐들어올 수도 있다”는 내용의 비밀 전문을 공개했다. 이에 따라 3월 10일 미국 군부는 이전의 경쟁과 갈등을 뒤로하고 키웨스트에 모여 회의를 가졌다. 이 회의는 핵무기 통제권을 민간의 원자력위원회에서 군대로 이관, 징병제 즉시 부활 등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핵공격 가능성을 열어 놓았고, 군비증강을 강조하고 있었다.

미국 군부와 행정부는 일련의 사태를 주시하면서 경제, 군사, 이념으로 소련공산주의의 팽창을 봉쇄하고자 했다. 트루먼 정부는 공산주의 이념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로 종교를 활용하고자 했다. 그것이 반공종교동맹을 통한 공산주의 봉쇄였다. 이는 서유럽에 형성된 자본주의 진영 내부에서 공산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고, 급속도로 소련공산주의 진영으로 굳어지는 동유럽를 균열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특히 이탈리아, 즉 로마 천주교가 뜨거운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보자. 미국 연방교회협의회의 주요 인사들은 공산주의의 반종교성에 대한 테일러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비민주성과 독재적인 조직을 들어 천주교의 참여를 강하게 반대했다. 또한 1948년부터 트루먼과 테일러는 WCC를 통하여 소련의 공산주의를 견제하고자 했다. 그 첫 작업은 바티칸을 설득해서 바티칸의 대표자를 참관인 자격으로 암스텔담 WCC 총회에 참여시키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다. 테일러는 세 가지의 안건을 가지고 제네바로 가서 WCC의 총무 비서트 후프트(Visser’t Hooft) 박사를 만났다. 미국의 대사가 WCC에 참석할 수 있는지 여부, 천주교회의 WCC 참석가능 여부, WCC에서 러시아정교회의 퇴출이었다. 후프트는 이 세가지 안건 모두를 반대했다. 이어 테일러는 다섯 명의 WCC 공동의장 중에 한 사람인 프랑스의 마르크 보에그너(Marc Boegner)와 런던의 켄터베리 주교를 만났다. 이들은 천주교회에 대하여 열려진 입장을 취하였으나 미국 정부 대사가 WCC에 참여하는 것과 러시아정교회를 퇴출하는 것에 대하여는 반대했다. 결국 WCC를 통하여 소련의 공산주의 확장을 저지하려던 트루먼과 테일러의 노력은 실패하였다.

1949년 5월 3일, 테일러는 뉴욕에서 FCC의 사무엘 맥크레와 감리교 감독 브롤리 옥스남, 장로교의 윌리암 푸 등 미국의 개신교 지도자들을 다시 만났다. 이들은 천주교의 구조는 마치 공산주의 그것처럼 전체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트루먼에게 “WCC는 공산주의를 억제하거나 무신론을 막는 단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대통령은 이해해야 한다”고 하였다.

동방정교회의 대주교 다마스키노스(Damaskinos)가 갑자기 사망하고, 트루먼의 정책을 지지하는 스피디온(Spydion)이 대주교로 선정되었다. 정확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테일러는 스피디온이 대주교로 선정되는데 일역을 담당했다. 또한 로마 교황 피우스 12세(Pope Pius XII)가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해 개신교와 협력하겠다고 선언하였다. 투르먼은 분위기가 성숙되었다는 판단에서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종교지도자 회의를 워싱턴에서 개최할 것을 선언한다. 그러나 켄터베리 대주교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 지도자들의 반대로 이 회의는 무산되었다. 이유는 반공종교동맹에 천주교를 참석시키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 연대를 통한 소련 봉쇄정책의 완전한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천주교와 개신교가 트루만의 정책에 근본적으로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 연방교회협의회와 WCC의 일부세력은 소련적대를 근간으로 하는 미국의 봉쇄정책에 동조·연동하였다. 즉 미국연방교회협의회와 WCC 일부 세력의 입장변화는 트루먼의 반공종교동맹이 일정 부분 성공했음을 의미했다. 이런 과정에서 천주교는 물론 개신교 각 교단들은 반공종교동맹이라는 보다 강력한 단체를 구성하지는 못했지만, 유럽과 미국 전 지역에서 공산주의 적대를 신념화하고 이를 통해 소련 공산주의 확산을 봉쇄하는 보루로서의 역할을 충실했다.

이러한 것은 미국 연방교회협의회와 WCC 일부 세력의 활동을 통해 확인되었다. 특히 미국연방교회협의회와 WCC와 국제선교위원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의 연합기관인 국제문제교회위원회(The Commission of the Churches on International Affairs, 이하 CCIA)는 공산주의 확산을 전쟁보다 위험한 것으로 규정하고 전쟁과 미국의 적 진영에 대한 핵공격을 지지하는 입장을 발표한다.

다음 회 : 미국연방교회협의회의 핵공격 지지와 NSC68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