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버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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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버텨야 한다
  • 최원영
  • 승인 2021.09.20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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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영의 책갈피] 18화

 

 

나이를 먹어갈수록 흔적이 남습니다. 얼굴에는 주름이, 마음에는 기억이 그것입니다. 주름과 기억 속에는 엄청난 지혜가 숨겨져 있습니다. 지혜는 고통을 겪은 후에야 얻을 수 있는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러니 주름과 기억을 억지로 없앨 이유가 없습니다.

주름이 생기려면 많은 세월, 그것도 혹독한 세월이 필요합니다. 혹독한 겨울 추위를 겪어야 비로소 가느다란 나이테가 하나씩 생기는 나무처럼 말입니다.

생명체에만 주름이 있는 것만은 아닌가 봅니다. 타이어에도 주름이 있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름이 있다고 합니다.

《언어의 온도》(이기주)에 타이어 가게의 엔지니어와 고객이 나눈 대화가 나옵니다.

“고객이 물었습니다.

‘타이어를 보면 어떤 생각 드시나요?’ ‘왜요?’

‘타이어가 운전자랑 닮았다거나, 뭐 그런….’ ‘아, 그럼요. 전 타이어만 봐도

운전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요.’ ‘정말요?’

‘네, 타이어의 마모 상태에 따라 고객의 운전습관이나 성향을 짐작하곤 해요. 원래 타이어의 정식 명칭은 고무바퀴(rubber wheel)였다고 해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다들 타이어라고 불러요. 왜일까요. 자동차 부품 중 가장 피곤한 게 타이어라는 거에요.’

‘아하, 재밌네요.’

‘예. 그런데 운전하면서 자동차의 발에 해당하는 타이어를 참 피곤하게 만드는 피곤한 운전자가 많아요. 운전에 ‘3급’이란 게 있어요. 급출발, 급가속, 급정지인데요. 이걸 밥 먹듯 하는 운전자들은 성격이 삐딱하고 과격한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들이 끌고 온 차량을 살펴보면 아니나 다를까, 타이어 상태가 엉망이라니까요.’”

급출발, 급가속, 급정지를 자주 하는 운전자는 작든 크든 사고도 많이 낼 겁니다.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눈에 보이지만, 진짜 원인은 보이지 않는 ‘3급’이란 것이지요. 일상에서 지극히 사소한 습관이 사고를 부릅니다. 그래서 가끔은 내 자동차의 타이어를 살펴보면 어떨까요?

삶도 그렇습니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속상할 때나 사람과의 관계가 원활하지 않아 불편할 때, 나 자신을 한번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 자신의 ‘3급’ 때문은 아니었는지를요.

타이어에만 주름이 있을까요. 내가 사용하고 있는 모든 사물에도 나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을 겁니다.

《한때 소중했던 것들》(이기주)에 30년 넘게 세탁소를 운영한 노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낡은 옷 곳곳에는 옷 주인의 삶이 묻어 있다.”

“바지와 치마의 윗부분 한쪽에 허름한 자국이 있으면, 거의 매일 크로스백을 메고 다니거나 짐을 자주 운반하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한여름에 두꺼운 점퍼를 수선하러 오는 사람은 어시장이나 냉동창고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그들에게 점퍼는 추위뿐 아니라 삶을 견디게 해주는 갑옷일 테니, 더 특별히 신경 써서 세탁이나 수선을 한다.”

나와 인연이 있는 모든 존재에게도 타이어와 옷에서 발견되는 주인의 흔적처럼 나의 흔적이 남아있을 겁니다. 그 흔적이 좋은 흔적으로 남아있기를 바랍니다.

때로 그 인연들과의 관계가 불편해질 때도 있습니다. 그때가 바로 나의 ‘3급’, 즉 급출발, 급가속, 급정지가 없었는지를 헤아려보는 시간입니다.

살면서 겪는 아픔의 순간순간들이 우리의 주름 속에 새겨질 때마다 그것을 ‘사고’가 아니라 ‘사건’으로 만드는 것은 순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지난 방송에서 살펴보았듯이 ‘사고’는 그 사고로 인해 나의 상태가 이전보다 더 나빠지는 겁니다. 그 일로 인해 분노와 원망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좌절감에 빠져 산다면 삶은 더더욱 불행해질 겁니다.

그러나 그 아픔이 오히려 나를 이전보다 더 성숙하게 만들고, 세상을 보는 시각이 이전보다 훨씬 더 넓어지고 깊어진다면, 이때의 ‘사고’는 ‘사건’으로 승화될 것이고, 그로 인해 나의 삶은 이전보다 훨씬 더 행복해질 겁니다.

그래서 아픔을 겪을 때마다 그 아픔을 회피해선 안 됩니다. 오히려 아픔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아픔이 나에게 온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도 나의 삶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고통의 순간들을 ‘버텨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모두가 행복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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